시가(詩歌)
시와 노래가 합쳐진 시가(詩歌)
시가라는 말은 시와 노래를 뜻한다.
그래서 시가는 시이며 노래다.
이런 성격을 지닌 시가는 어느 시기부터 서서히 시와 노래로 분리되더니 현대에 와서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시가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설화와 시가가 함께 존재하던 때를 살펴보아야 한다.
신라인들에게 시는 노래였고, 노래는 시였다.
시가에서 중심이 되는 건 노래였다.
어떤 사건의 과정 속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노래였다.
여기에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말이 더해졌다.
이 때 시가는 사건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서기 42년 3월 계욕일에 북쪽 구지봉(龜旨峯)에서 사람을 부르는 듯한 수상한 소리가 났다.
200~300명의 사람이 거기에 모였다.
그러자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내어 “여기 누가 있느냐?”고 물었다.
구간(九干) 등이 “우리가 있소”라고 대답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구지봉이요”라고 대답했다.
다시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므로 내려 왔다.
너희들은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내면서 이렇게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쁨의 춤을 추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 놓아라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구간 등이 그 말과 같이 하며 모두 기쁜 마음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러자 자주색 노끈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노끈의 아래를 살펴보니 붉은 보자기에 싼 금합(金合)이 놓여있었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황금빛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여 수없이 절을 했다.
조금 있다가 금합을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평상 위에 두고 무리들은 흩어졌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다시 모여 금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모두 동자로 변했는데 용모가 매우 준수했다.
이 시기의 시는 개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왕을 맞이하기 위한 <구지가(龜旨歌)>는 집단으로 부른 시가다.
이 때 시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보다는 노래라는 수단을 통하여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노래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시가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정서가 중요시되는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시가 노래에 얹혀 있다고 해서 노래에 종속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노래는 말을 전달수단으로 하여 불릴 때만 그 기능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랫말도 나름의 독자성을 가졌다는 얘기다.
소리와 말이 가지는 주술성이 합쳐질 때 노래는 노래로서 완성된다.
시와 노래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시와 노래는 분리되기 시작한다. 이건 개인의 정서표현이 활성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고려 후기쯤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개인 창작시가 활발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 쓰인 글을 보면 시가 노래로 불리지 않는 현상이 발견되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시와 노래의 분리는 20세기 들어와 더욱 심화되었다.
이때부터는 시가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시는 현대시를 가리키게 되었다.
노래를 유행가라고 하여 따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와 노래의 이런 분리 현상은 인간의 정서표현 방식이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삶의 방식의 변화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시와 노래의 분리현상이다.
최철호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