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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지명의 유래

천지인야 2013. 2. 6. 02:49

김포지명의 유래

1. 군내면(郡內面)

군내면이란 명칭은 군치소재(郡治所在)와 그 인접지역이란 의미이다.
광무 3년(1899)의 <김포읍지>에는 관문(關門)에서 서쪽 8리의 지역이라
기술하고 있다.

 

2. 석한면(石閑面)

석(石)은 훈(訓)이 ‘돌’이거니와 이 글자는 ‘달’을 표기하기 위한 훈차(訓 借)로
사용한 것이다.

고대의 인명(人名), 지명(地,名), 관명(官名)등의 표기체계에서
‘달’은 단어의 첫째음절에서는 높다(高)의 뜻으로 쓰이고,

다른 음절에서는 산(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閑)은 고대어의 ‘크다,많다’를 표기하기 위한 음차(音借)무자로 쓴 것이다.
뜻은 지체가 높은 사람 곧 존장(尊長), 왕(王)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석한(石閑)은 ‘달한’의 표기로 ‘높은 신분의 소유자가 사는
마을, 존장의 고을’이란 뜻이다.

석한면의 으뜸되는 마을인 샘재에는 물론 재촌, 고창 마을에 청동기시대의 부족장의 묘인

지석묘가 여러 기(基)로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 일대를 통치하던 통치자의 고을이기 때문에

달간(한)으로 불려 오다가 이를 한자지명으로 고칠 때 음차의 방법을 원용하여
석한(石閑)으로 표기한 것이다.

 

3.고현내면(古縣內面)

인조(재위1623∼1649)가 반정(反政)으로 광해군을 퇴위(退位)시키고 왕위에 오른 후,
동왕(同王)5년(1627)에 부친과 모친의 묘인 흥경원(興慶園)을 김포 북성산으로 천장
(遷葬)하고 다시 동왕 10년(1632)에는 부(父)를 대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장릉(章陵)
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헌종 8년(1842)집필된 <김포군읍지> 능침(陵寢)항에
‘장릉은 군의 남쪽 5리에 모셨는데 정남향이다’라 했고 같은 책의 건치연혁(建治沿革)
에 “군터는 처음 장릉 아래에 있었는데 천계(天啓:명나라의 연호) 병인년(1626)에
능을 새로 모시고 지금의 장소로 옮겨 지엇다.”고 한 기사에서 읍치소재가 장릉
경내에서 북변리로 이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이 읍치소재 부근 마을을
현내면(縣內面)이라 하고, 현에서 읍으로 승격한 후에는 군내면(郡內面)이라
하는데, 읍치소재가 북변리 일대로 옮겼으므로 자연히 예전의 읍치소재 마을은
고현내면(古縣內?)이 되었을 것이다.

 

1) 북변리(北邊里)

조선조 초기의 방리는 원래 방위에 의해 구분되었다.
본 북변리는 이러한 옛 체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북변리는 구 김포군청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어서 북변리라 한 것으로 고유어 명칭은 북녘말이다.
동편은 동변ㆍ동녘말, 서편은 서변ㆍ섯녘말, 가운데 마을은 중구라 불려왔다.
북변리는 북녘말이라는 뜻 이외에 뒷마을의 뜻도 된다.
북(北 )의 뜻이 원래 ‘뒤’였으므로 군치소재(郡治所在)의 뒷마을이란 의미를
북변리(北邊里)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2) 걸포리(傑浦里)

걸포리의 전래 지명은 ‘거래’였고 한자표기도 현재와는 다른 걸포리(乞浦里)
였던 것 같다. 걸포리의 다른 명칭은 걸개, 걸포천 등이 있다.
걸포리의 전래 지명 거래는 걸+애(접미사)로 분석되며 고유어 ‘걸’은 개천의 뜻이다.
강(江)의 고어(古語) ‘가람’도 같은 어원(語源)에서 파생된 어휘이다.
고어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는 경상도 방언에서는 지금도 개천을 걸이라 한다.
덕적도와 같은 중부지역에서도 걸이 현재 많이 쓰이고 있는 바,
은하수(銀河水)를 ‘이른내걸’이라고 한다.
위와 같이 걸애 또는 거래는 개울, 도랑의 뜻이므로 이런 어휘가 지명에
쓰이면 ‘개울이 있는 마을’의 뜻이 된다. 현재도 걸포리는 하천에 둘러싸이다시피한
개울이 많은 마을이지만 옛날 한강제방이 없었던 시절은 거의 섬과 같은 지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마을에 개울이란 고어가 지명으로 쓰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3) 걸포 1리∼4리

선거인(先居人)에 대한 문헌적 기록이 없다. 예로부터 방(方)씨의 집성촌이었다 하는데
현재 20 여호, 풍양조씨(豊壤趙氏)는 300여년 전부터 세거(世居)해 왔으며, 10 여 호가
거주하고 있고, 진주강씨(晋州姜氏)와 강릉유씨(江陵劉氏)는 300여년 세거해 왔고
각각 10 여 호와 70 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① 걸포: 걸포 1리 마을로 예전부터 방씨가 세거해 왔기 때문에 방촌말이라고도 한다.
② 서촌: 걸포 2리 마을로 강릉유씨가 세거해 왔기 때문에 유촌, 유촌말이러고도 한다.
③ 향교: 걸포 3리 마을로 서촌의 동편에 있고 걸포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이 마을에 예전에는 향교가 있었기 때문에 향교촌이라 했다고 한다. 걸포리에
있던 향교는 풍무리, 북변리 순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④ 신향: 걸포 4리 마을로 걸포리에서 제일 남쪽이 된다. 새말이라고도 부르는 바,
을축년(1925) 큰물 때 한강변 오염에 살다 물난리를 만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살게 되어 새로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새말, 신향이라 불러왔다.

 

3. 운양리(雲陽里)

예로부터 운양포(雲陽浦)가 있어 운양리로 불러 왔다는 설과 운양산 일대에
안긴 마을이라 하여 운양리로 했다는 설이 있다.

1) 운양 1리 천현(泉峴)

풍산심씨(豊山沈氏)는 약 600여년 전 입향하였고,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그 후에
입향하여 10 여 호가 세거(世居)해 왔고, 강릉김씨(江陵金氏)도 그 후에 입향하여
2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명칭: ① 천현 마을 뒷산인 모담산 중턱에서 샘물이 흘러 천현이라 했다고 한다.
② 이 마을의 모담산에는 새나뭇골에 유명한 약수터가 있고 마을 앞에도 샘재
연못이란 샘이 있다. 또한 현(峴)자는 단순히 고개만을 의미할 때도 있지만
곡(谷), 암(岩), 천(川)등과 같이 마을이름에 사용하면 그러한 특징을 가진 마을의
뜻도 된다. 나아가서는 단순히 마을이름을 조어(造語)하기 위한 접미사로 사용하는
예도 많다. 따라서 천현이란 한자 지명이나 샘재라는 고유지명이 ‘샘이 있는 고개’
가 아니라 ‘샘이 있는 마을’의 뜻이 더 자연스럽다.
③ 고어(古에語)에서는 ‘재는 자, 잣’과 함께 성(城)의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감바위, 지석묘등이 있고 또한 노차묵골에서 토석을 채취할 때
그 일대에서 돌칼, 돌살촉등의 신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다. 다시 말하면
통치권을 지닌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뜻이고 보면 모담산 일대에 성(城)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것들로 볼 때 샘재는 ‘샘이 있는 성(城)마을’의 뜻이 된다고 하겠다.

2) 운양 2리 청수(淸水)

나주김씨(羅州金氏)는 13대를 세거(世居)해 왔고 현재 15호, 고성김씨(固城金氏)와
전주이씨(全州李氏)는 8대 세거에 각각 4호가 거주하고 있다.
명칭: 예로부터 마을이 청석(靑石)으로 되어있어 청석에서 솟는 물이 맑다하여
청수(?水)라 했다. 또한 예전부터 이 마을에는 좋은 우물이 네 개나 있어
청수동(?水洞)이라 하였다.
전래의 명칭은 ‘청석골, 청석굴, 청숫골, 청숫굴’등이 있다.

3) 운양 3리 재촌(齋村)

고성이씨(固城李氏)는 28대 세거(世居)에 13 가구, 풍산김씨(豊山金氏)와 순천도씨
(順天陶氏)는 17대 세거해 각각 13 가구씩 거주하고 있다.
명칭: ① 마을내에 재궁(齋宮)이 있어서 재촌이라 했다고 전해오기도 하고 조선조
어느 후궁의 아들 곧 어느 군(君)이 이 마을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재촌이라
했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② 재궁을 달리 재실(齋室)이라고도 하거니와 능이나 종묘(宗廟)에 제사지내는
집, 또는 무덤이나 사당옆에 제사지내기 위해 지은 집을 말한다. 예컨대 장릉의
재실 같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마을에 능이 있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궁이 있었기 때문에 재촌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운양 4리 대촌(大村)

1842, 1871, 1899년에 걸쳐 만든 <김포군읍지>에도 대촌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운양리에 속했던 자연 마을의 규모였던 듯하며, 통합 전에
운양리에 두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큰 마을을 대촌(大村)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고유명칭은 ‘큰말’이다.

5) 운양 5리 발산(鉢山)

선거인(先居人)에 대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두릉두씨(杜陵杜氏)가 150여년 세거(世居)
해왔고, 그 후에 경주정씨(慶州鄭氏)가 입촌하여 세거해왔다고 한다.
명칭: ① 옛적에는 ‘바위배기’라 불러왔는데 대촌에 용화사가 창건된 후부터 그 절에서
들여오는 효종성(曉鐘聲:새볔종소리)을 듣고 ‘발산’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② 우리나라 전통지명 주에 가장 대표적이며, 흔한 것이 발산(鉢山)이다.
일반적으로는 마을산의 형국이 바리때와 같아서 바리 발(鉢)자를 써서 발산이라
했다는 유래가 전해온다.

최남선(崔南善)은 일찍이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우리민족 사상을 ‘ㅂ+ㆍ+ㄺ’
(밝음-독자 主)에 근거해 설명하고 그 후 많은 학자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이 사상은 우리민족이 광명(光明), 즉 하늘을 숭배하는 전통적 사고를 지니고 모든 것을
하늘에 의지해 기원하는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원의 형식으로 높은 산에 제단을
만들고 천신제(天神祭)를 지냈던 것이며, 그 변형으로 삼한시대의 소도(蘇塗), 그 이후의
당제(堂祭), 동제(洞祭)등이 출현하였다.
본 발산마을도 예전부터 산울 옆의 당목(堂木)에서 당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마을의 예전 이름은 ‘ㅂ+ㆍ+ㄺ+뫼’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이
바리미로 변한 뒤 한자식 지명으로 옮겨 쓰는 과정에서 바리때 발(鉢 )자를 써서
발산(鉢山)이라 했을 것이다. 이 경우 산(山)은 반드시 산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마을이라는 일종의 지명 접미사의 기능을 한다.

 

4. 장기리(場基里)

예전부터 이 일대로는 강화로 통행하는 큰 길이 지나고, 또 사람의 왕래가 빈번해짐에
따라 장(場)도 섰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생겼다. 장기리는 곧 ‘장터마을’이라는 의미로
위의 내용과 같은 역사에 연유해서 작명된 것으로 장기(場基), 장터, 장텃거리 등의
다른 명칭이 있으나 이것들은 장기리 전체의 명칭으로 사용하지는 않고 예전 장이 섰던
곳이라 전해지는 지역을 말하는 소지명(小地名)으로 사용한다.

1) 장기 1리 운곡(雲谷)ㆍ4리 도곡(桃谷)

선거인(先居人)에 대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운곡의 전주이씨(全州李氏)는 100 여년
전에 입향하여 3 가구, 평해황씨(平海黃氏)도 입향시기는 비슷하며 5 가구가 살고 있다.
도곡은 남원양씨(南原梁氏)가 100 여년 세거해와 4 가구, 예안이씨(禮安李氏)와 전주이씨
(全州李氏)도 100 여년 세거해와 각각 1 가구씩 거주하고 있다.
역사서들은 이 마을을 운유하리(雲遊下里)로 기록하고 있다.
명칭: ① 석한면(石閑面)의 운유하리와 도곡리를 일제가 합치면서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
잘라내 운곡(雲谷)이라 명명했다.
운유하리의 전래명칭은 운양아래이다. 운유산(雲遊山)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어서
운유하리였던 어형이 바음하기 쉬운 ‘운양’과, ‘하리>아래’가 결합해 운양아래로
불려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②도곡(桃谷)은 이 마을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복숭아골 즉 도곡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마을의 전래지명은 도티올로 이것은 ‘돝의골>도틔울>도티울의
변천과정을 상정할 수 있거니와 아마 가현산과 운유산 줄기가 만든 긴 골에 펼쳐진
마을이므로 예전에 멧돼지가 출몰해서 명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2) 장기 2리 고창(高昌)ㆍ5리 하고창(下高昌)

조선조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청송(靑松) 심강(沈鋼)의 자(子) 효겸(孝謙)이 입향조
(入鄕祖)로 현재 이 마을에는 청송심씨가 30 여호 세거(世居)하고 있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1674년 파주군 교하면에서 제정공의 29세 재희(在熙)가 입향조로
하고창에서 세거해 왔다.
명칭: 청송심씨 가문에서 등용되는데 마을이름이 좋지 않다 하여 고창으로 고쳤다 하나
예전 명칭은 알 수 없다.
<호구총수>에는 고창리로 되어 있으나 심조(沈潮 1694∼1756)의 연보(年譜)인
<정좌와공연보(靜坐窩公年譜)>에는 고산(高山) 또는 고창산(高昌山)이라 기재되어
있는데 고산이란 명칭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고창산은 고창뫼이므로 그것이 고창미로 변천한 것이다.

3) 장기 3리 지경(芝境)

약 300 여년 전쯤 고창에서 분가한 청송심씨들이 마을을 형성해 세거(世居)해왔고
현재 10 여호의 청송심씨들이 살고 있다.
1914년 일제가 옛 김포군과 통진군을 병합하기 전에는 본 마을이 두 군(郡)의
경계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지경(地境)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한자표기가 지초 지(芝)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지경이란
법정리는 옛 문헌에 없기 때문이다. 고어(古語)에서는 경계를 ‘디경’이라 하는데
디경>지경으로 변천해온 어휘로 볼 수 있다.

 

5. 감정리(坎井里)

감정리의 뒤에 중봉산(重峯山)이 있는데 그 산 밑에 우물이 아홉 개 있어 구우물이라
하였으나 구우물(九井)이 굳우물(坎井)로 변천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장릉의 역사(役事)때 광중을 파니 물이 솟아 능터를 지정한 지관에게 사실을 알리니
풍무리쪽 능선을 지팡이로 꾹 찌르자 샘이 솟구치고 광중의 물이 잦아 산역(山 役)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방책으로 물줄기를 따라 감정리에 이르러 아홉 군데에
우물을 파 장릉의 물줄기를 완전히 잡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구 우물이라 불렀는데
굳우물로 변천했다고 한다.
아홉 개의 우물을 표기하면 ‘굿우물’이 되거니와 그것은 복합어를 만들 때 사잇소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굿+ 우물은 ‘굳우물’로 발음된다. 한편 감(坎)은 구덩이의 뜻이며
고어(古語)가 ‘굳’이었다. 굳우물을 한자식지명으로 표기할 때 ‘굳’을 구덩이로
해석하여 감정(坎井)이라 써온 것으로 생각된다.

1) 감정 1리 내옹(內翁)ㆍ2리 옹정(翁井)

전주이씨(全州李氏)는 11대를 세거(世居)해왔고 현재 20여 가구, 합천이씨(陜川李氏)는
10대를 세거해왔고 현재 3 가구, 하동정씨(河東鄭氏)는 11대를 세거해와 현재 5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명칭:① 내옹: 예전 이 마을에 옹주(翁主)가 살면서 사용하던 우물이 있어 옹주우물(翁主
井)이라 했다. 그 후에 옹주의 묘를 쓰고 난 후부터 옹주정의 안쪽마을이라 하여
안옹주물이라고 했다 한다.
②외옹: 옹주정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바깥옹주물이라 했고 한자식 지명으로
외옹(外翁)이라 했다고 한다.
③뱀굴: 대곡리 설원마을과 본 마을에 세거해온 하동정씨 가문에서 이 마을에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동(學童)들을 가르쳐 왔기 때문에 배양곡(培養谷)이라
했다고 하동정씨 가승(家乘)에 기록되어 있다.
옛 문헌에는 내옹, 외옹, 뱀굴을 구분하지 않고 옹자정리(瓮子井里)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옹(瓮)은 항아리의 뜻이며, 자(子)는 단어를 만들기 위해 의미 없이 사용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옹자정은 독우물의 뜻이다.

2) 감정 3리 감정(坎井)ㆍ4리 나진(羅津)ㆍ5리 독자(獨子)

① 감정리에는 전주이씨 해안군파가 14대를 세거해왔고 현재 5 가구, 수안이씨(遂安李氏)는
9대를 세거해왔고 7 가구, 남평문씨(南平文氏)는 9대를 세거해왔고 3 가구, 경주이씨(慶
州李氏)는 9대를 세거해왔고 6 가구, 창녕조씨(昌寧曺氏)는6대를 세거했고 4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감정(坎井)이란 마을이름은 마을 뒷산인 중구봉에 아홉굽이와 산밑에 아홉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구감동(九坎洞)이라 불러왔다.
② 나진마을의 선거인(先居人)은 강릉유씨(江陵劉氏)지만 입향내력을 알 수 없다.
나진교는 다리를 놓은 뒤에 생긴 이름이고 그 전에는 나진포(羅津浦)였으니 이것은
‘낮은개’를 한자식지명으로 옮긴 것이라 한다.
③ 독자마을에는 남양홍씨(南陽洪氏)가 100여년 전에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현재 남양홍씨는 2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독자(獨子)란 지명은 이 마을 사람들이
자손을 두되 독자밖에 없어 손이 귀하다 하여 붙인 것이라 한다.
④ 망흥곡(亡興谷)은 전래의 명칭이 ‘망골’인 바 유래는 아래와 같다.
예전에는 여우재고개 주변에 삼림이 무성하여 사람의 통행이 자유롭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고개를 넘을 수 있었는데 여우재고개에서 망골골짜기를
통해 들어가는 경우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불로리 방향에서 아래쪽으로
들어가면 돌아올 수 있어서 곧 흥(興 )했으므로 두 글자를 합쳐 망흥곡이라
했다고 한다.
다른 전언(傳言)으로는 행상머리와 망굴의 부자가 누가 더 부자인가 노적의
크기를 다투며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다가 망굴쪽의 부자가 졌기 때문에
망골(굴)이라 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