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浦/◑ Panorama

유형문화재

천지인야 2013. 2. 6. 17:12

  • 유형문화재
    • 우저서원
      우저서원
      이전 사진
      우저서원
      우저서원
      우저서원
      우저서원
      다음 사진
      작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큰사진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분류 : 지방유형문화재 제10호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감정동 492
      시대 : 조선


      우저서원(牛渚書院)은 조헌(趙憲)선생을 봉사(奉祀)하기 위하여 인조26년(1648)에 창건되어 숙종 원년(1675)에 사액되었다.


      선생의 구저지(舊邸地)에 세워진 것으로 목조 단층 와즙건물로 본당, 외삼문, 비각, 내삼문 등이 있다.
      선생은 명종22년(1567)에 급제하여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5년(1572) 홍문관 정자로 왕의 불공이 옳지 않음을 극간(極諫)하다가 파면(罷免)되는 등 바른 말을 잘
      하였다. 선조5년(1586)에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서 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程文)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으며 선조19년(1586)에 공주제독(公州提督)으로 있을 때
      소를 올려 이이선생을 변호하고 정여립의 행패를 통박하였으나 각하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으로 돌아갔다.


      선조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통로를 차단하는 등 공을 세웠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의 시기를 받아 홍성지방으로 옮겨가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왜적이 청주에 진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번 패하고 승장(僧將) 영규(靈圭)의 군사만이 적을 견제하고 있어 영규와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뒤이어 금산의 적이 충청도 일대를 석권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영규와 함께 전주에 내려가 700명의 의사를 얻고 그 길로 금산을 향해 금산10리 밖에 이르러 역습(逆襲)해 오는 적을 맞아 역전분투하여 적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으나 힘이 다하여 조헌, 영규이하 700의사가 전원순절하니 한무덤에 700의사를 모시어 700의총이라
      하게 되었다.


      선생은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사 충신으로 일컬어 진다.
      관광안내지도보기(새창) 교통안내지도보기(새창)
       
      찾아오시는 길
      우저서원 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