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學習/♧ Epi ♤ Story

성균관의 학생들

천지인야 2013. 2. 7. 22:54

조선시대 대학에도 학생회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대학 성균관은 국립 대학이었던 만큼 당시 대학생들은 등록금은 물론 학용품과 생활용품, 심지어 용돈까지 지급 받았다. 그만큼 성균관 입학은 쉽지 않았고, 합격생들은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수재들이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들이었던 이황, 이이, 조광조, 정약용 등은 모두 성균관 출신들이다.
 
     세부설명
  1. 원점제도

성균관에는 요즘 대학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제도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 출석체크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식당에서 이뤄졌는데 출석일수를 점수화 시키는 것으로 원점제도라 한다. 원점제도는 근면함을 측정하는 것으로 과거의 당락을 결정짓기도 하였다. 당연히 부정한 방법으로 출석점수를 고치는 편법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기도 했다.


2. 성균관 기숙사

조선시대 대학생들은 전원이 의무적으로 기숙사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곳은 동재와 서재로 구분되는데 지금도 붓과 벼루 대신 컴퓨터가 들어왔을 뿐 방안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성균관 대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유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하여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관내 약방이 생겨났고 혜민서에서는 의원이 파견 나와 학생들을 돌보기도 했다.


3. 흥미로운 과거 시험장 풍경

유생들 사이에서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각종 부정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그 모습들이 현재와 너무도 흡사하여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붓두껑에 컨닝 페이퍼 숨기기, 콧구멍에 숨기기, 답안지에 이름을 바꿔 붙이는 절과 등, 이에 맞서 시험관의 적발방법도 덩달아 개발되어 재미있는 시험장 문화를 낳기도 했다.


4. 국가의 관심과 지원

성균관에서 길러진 인재들은 과거를 통해 국가관리로 임용되는 만큼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지원은 대단했다. 그 규모만 해도 궁궐 다음이었고 문헌을 보면 국가예산의 절반이 성균관에 투입됐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5. 조선시대 대학가

왕세자까지 공부했던 성균관에서는 학령이 엄격했기 때문에 바둑이나 장기 등의 놀이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당시 대학가였던 반촌이라는 곳에 나와 향수를 달래고 스트레스를 풀었다. 당시 성균관 앞에는 반수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건너편 마을을 반촌이라 하였다. 이곳은 음료수를 팔기도 하고 하숙집도 많아 유생들의 해방구와 같았을 것이다.


6. 조선시대 학생회의 역할

조선시대 총학생회인 재회는 신입생 환영회, 자체 징계 등 관내 자율운영을 담당했지만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의 대자보와 같은 벽서를 성균관 곳곳에 붙여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도 했고 국가나 사회에 부당한 일이 있을 때는 수업거부나 동맹휴학을 통해 그들의 뜻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행위들은 대부분 젊은 기개와 정의감에 바탕하고 있어서 조정에서도 많은 부분을 정책에 반영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