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인야 2013. 2. 7. 23:00

 
사라진 보물창고, 외규장각
1886년 병인양요,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적을 비롯한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리감에 도취되어 외규장각 도서 중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조차 몰랐다.
 
     세부설명
  1. 120년만에 등장한 외규장각

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은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그러나, 1993년 미태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의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였다.


2. 둘도 없는 보물, 어람용 의궤

의궤는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이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의궤 자체 값어치도 크지만 프랑스에 가있는 의궤는 의미가 각별하다. 의궤는 보통 관청에서 보관하는 분상용과 왕실보관용으로 어람의궤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분상용만 남아있는데 비해 프랑스에 가있는 것은 어람용 의궤인 것이다.


3. 조선 왕조 최고의 보물 창고, 외규장각

정조가 규장각을 세웠던 이유는 당쟁으로 인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규장각을 새로운 정치기구로 이용하고자 함이었다. 정조 자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국내외 수많은 서적들을 망라해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했던 규장각은 왕권의 상징이자 핵심 권력 기관이었다. 그러던 중 다시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든다. 그것은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함이었다.


4. 최고의 보관처, 강화도

정조는 이렇게 귀중한 물건들을 왜 강화도에 보관했을까? 강화도는 이미 고려시대 몽고군에 맞서 40년간 항쟁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 난리가 일어날 때 국왕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특히 물살이 급한 해로와 드넓은 개펄이 있어 천연의 요새다. 정조는 이런 강화도야 말로 최고의 안전지대라 믿고 외규장각을 설치했던 것이다.


5. 영상복원, 외규장각

강화군은 5년 전부터 외규장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70년대 고려궁지를 성역화 하면서 졸속으로 세운 담장 때문에 발굴작업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난관 끝에 최대한 고증에 입각한 외규장각이 영상으로 복원되었다.


6. 외규장각은 왜 그렇게 쉽게 불탔는가?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할 때 병력은 군함 7척에 군인 1460명이었다. 이들 앞에 수대에 걸쳐 외성과 내성을 쌓고 거기에다 돈대까지 쌓은 강화도는 의외로 허무
하게 무너진다. 당시 정규군은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 프랑스군은 무력으로 손쉽게 강화를 점령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문화수준에는 감탄한 나머지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