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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음악

천지인야 2013. 9. 9. 13:35

고구려의 음악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대륙의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여 가장 발전된 음악문학를 소유하고 있었다.

◈ 왕산악과 거문고

거문고는 재상 왕산악에 의하여 늦어도 4세기경에는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산악은 거문고의 제작자일 뿐 아니라 거문고 곡의 작곡자이자 연주자이기도 한 뛰어난 음악인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왕산악이 일백여곡을 지어 연주했더니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고 그래서 악기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 불렀는데 나중에는 단지 현금이라고만 불렀다고 전한다.

거문고는 노래와 춤의 반주악기로도 사용되었고 독주악기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백제를 통하여 일본에 전하여졌으며 일본에서는 이 악기를 구다라고도(百濟琴)라 불렀다.

◈ 안악 제3호분에 나타난 음악

고국원왕 27년(357년)에 만들어졌고 중국인 동수(冬壽)의 묘로 추정되는 안악 제3호분에는 세 가지의 주악도가 그려져 있어서 연주활동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설에는 입고(立鼓)를 치는 사람, 소(簫)를 부는 사람, 노래를 부는 사람의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한나라의 황문고취(黃門鼓吹)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 회랑에는 북, 소, 각(角), 요를 연주하는 기마악대와 담고(擔鼓), 탁(鐸)을 연주하는 보행악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중 기마악대는 한나라의 고취 중 단소요가(短簫?歌) 형태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후실에는 종적(縱笛)ㆍ완함(阮咸)ㆍ거문고의 반주에 춤추는 서역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이것은 잔치음악의 연주형태로 보인다. 이상 세 가지 주악도는 이 시기에 고구려가 이미 한나라나 서역과 음악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 수나라와 당나라에 소개된 음악

5세기 이후 고구려는 중국 및 서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피리를 비롯한 서역의 악기와 중국의 악기를 알맞게 수용하여 백제나 신라보다도 한층 더 발전된 음악문화를 보유했다.

고구려 음악인들은 6세기말 수나라 궁궐 안에 설립된 칠부기(七部伎:國伎,淸商伎,高麗伎,天竺伎,安國伎,龜玆伎,文康伎)나 7세기초의 구부기, 그리고, 7세기 초 당나라의 십부기 중에 고려기라는 이름으로 참여하여 활발한 연주활동을 벌였다. 당나라의 십부기 중 고려기에 사용된 악기는 비파, 오현, 의취적, 생, 호로생, 소, 소피리, 도피피리, 요고, 제고, 담고, 용두고, 철판, 패, 대피리 등이다. 고구려의 이러한 악기편성은 서양과 거의 일치하는데 따라서 고구려음악은 중국 대륙의 서북지방에 자리잡은 서양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음악

수서(隋書)에 의하면 6세기 경 백제 음악에는 고(鼓), 각(角), 공후, 쟁(箏), 우, 지,적(笛) 같은 악기들이 있었다. 다른 나라의 악기와 비교해볼 때 고구려가 서역 음악적 요소가 강한 중국 북조음악과 가까웠던 데 비하여 백제는 중국 남조음악과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음악은 특히 일본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백제는 네 명의 악사를 교대로 일본에 파견하여 횡적, 군후, 막목, 춤을 각각 가르쳤다. 이들이 가르친 음악은 일본의 전통궁중음악인 가가꾸(雅樂)를 형성하는 데 고구려, 신라의 음악과 함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554년에 삼근, 기마차, 진노, 진타 등 악사가 그 이전에 파견된 악사들의 교대 요청에 따라 파견됐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미마지라는 백제 사람은 중국에서 배운 기악(伎樂)을 612년 일본에 전해주었다. 미마지는 일본에 귀화하여 사꾸라이(樓井)에서 소년들을 모아 기악을 가르쳤다.

기악에 대한 일본측 기록과 토다이지(東大寺) 등 일본의 여러 절에 보존되어 있는 가면으로 미루어 기악은 한국의 탈춤, 즉 산대극과 비슷한 것임이 밝혀졌다.

가야와 신라의 음악

신라는 대륙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삼국 중에서 음악이 가장 늦게 발전했다. 그러나 우륵을 통하여 가야의 음악을 수용한 후에는 궁중음악의 새로운 기틀을 세우는 등 음악문화의 발전에 전기를 마련했다.

◈ 신라의 일반인이 즐긴 향토음악

6세기 이전, 즉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신라에는 일반 백성들이 즐기던 향토색 짙은 음악들이 있었다. 유리왕 때 만들어진 <회악>과 <신열악>, 탈해왕 때 <돌아악>, 피사왕때 <지아악>, <사내악>, 내물왕 때 <가무>, 눌지왕 때 <우식악>, 자비왕 때 백결이 만든 <대악>, 지증왕 때 천상욱계자가 만든 <우인>, 법흥왕 때 <미지악>, 진흥왕 때 <도령가>, 진평왕때 담수가 지은<날현인>, 원랑도가 만든 <사내기물악>, 일상군 지방의 <내지>, 압량군 지방의 <백실>, 하서군의 <덕사내>, 도동벌군의 <석남사내>, 북외군의 <사중>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지방 사람들이 즐겨한 음악으로 악조나 악기의 수, 또는 노래와 춤의 모양은 전하지 않는다.

◈ 가야의 가실왕, 우륵과 가야고

6세기경 『삼국사기』에는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서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변한과 진한에 있어온 '고'라고 불려졌으리라 추측되는 고대 현악기를 개작하면서 중국악기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실왕은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른데 그 음악이 어찌 같을 수 있느냐'라 하고 악사 우륵에게 가야금곡 열두 곡을 짓도록 했다. 우륵은 가야국이 망할 것을 알고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하는데,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지금의 충주)에서 살게 하고 대내마 법지와 계고, 대사 만덕을 보내어 그 음악을 배우게 했다. 우륵은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법지에게 노래, 계고에게 가야금을, 만덕에게 춤을 각각 가르쳐주었다. 우륵이 보유한 음악은 향토성을 띤 민속예술음악이었으며 악(樂), 가(歌), 무(舞)가 한데 어루러진 종합예술형태로 연주되었다.

◈ 우륵의 제자들과 신라의 궁중음악

신라의 악관들인 대내마 법지, 대내마 계고, 대사 만덕 등 세 사람은 우륵이 지은 열구 곡중에서 열한 곡을 전수 받고 이것을 다섯 곡으로 개작하였는데 이것이 신라의 궁중음악(大樂)으로 채택되었다.

우륵의 열두 곡과 제자들의 다섯 곡이 지닌 특징은 각각 민속음악과 궁중음악의 특성으로서 흔히 거론된다. 우륵이 열두 곡은 지역적 특색이 두드러진 음악이었으며 또 제자들이 '번거롭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다고 할 수 없다(此繁且淫不可以爲雅正)'고 평가한 데서 속도가 빠르고 잔가락이 많으며 표출력이 강한 음악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제자들이 개작한 다섯 곡은 처음에 개작한 사실을 알고 화를 내었던 우륵이 그 음악을 다 들은 후 감탄하면서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아니하며 애처로우면서도 비통하지 아니하니 바른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樂以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고 말한 것으로 비추어 감정표현이 절제되고 승화된 음악이며 연주하기에 번거롭지 않은 음악, 즉 속도가 느리고 잔가락이 비교적 없는 음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륵의 제자들이 확립한 신라 대악의 전통은 오늘날 정악 또는 아악이라 불리는 범주의 음악들에 그 특성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 신라의 음악기관 음성서

삼국시대의 고구려ㆍ백제ㆍ신라에는 각각 나름대로의 국립음악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고구려ㆍ백제에서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신라의 음악기관 음성서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있다.

신라의 국립음악기관 음성서(音聲署)는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음성서의 악관에 해당하는 대사 두 명을 두었다는 진덕왕 5년(651년)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진 것이 틀림없다. 음성서는 예부의 한 독립기관으로 장(시기에 따라 '경', 또는 '사악'으로도 부름) 2명을 우두머리로 하여 아래로 대사(시기에 따라 '주부'로도 부름) 2명, 사4명의 악관들이 있었다. 이 악관들은 궁중행사에 소용되는 음악과 무용을 위한 악공들의 연주와 교육 등을 행정적으로 관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음성서 관리의 지휘 아래에 있었던 악기연주자, 가수, 무용가들은 모두 척(尺)이라 불렀다. 즉 가야금 연주자는 금척, '가'라는 관악기의 연주자는 가척, 노래부르는 가수는 가척(歌尺), 춤추는 사람은 무척 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