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學習/♧ Simple♤ Life

조선전기의 음악

천지인야 2013. 9. 9. 16:20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태조 원년(1392년) 문무백관의 제도를 새로 정할 때 음악을 다스리는 아악서와 전악서를 계승하면서 악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정도전이 납씨가, 궁수분곡, 정동방곡, 몽금척, 수보록을, 하윤이 근천정, 수명명, 도성형승지곡, 도인송도지곡 등의 노래를 지어 올렸고 이들 악기는 관현반주에 올려 여러 궁중의식에서 연주되었다. 그런데 이 곡들은 가사만 달랐지 고려 때의 음악을 개작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세종 대에 이르러서야 음악정리사업이 비로소 이룩되었다. 세종 대왕은 박연을 중심으로 중국계 아악과 아악기를 정비케 하고 친히 음의 높이와 길이를 나타낼 수 있는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여 악보를 간행하고 향악을 새로 작곡하는 등 빛나는 업적을 후세에 남겼다.

세종 초의 아악정비는 악학별좌 박연에 의하여 아악기제작에서 시작되었다. 예조 산하의악기도감이 1424년 설치되고 박연이 율관을 제작하고 그 율관에 맞추어 편경과 편종이 제작되었다. 박연은 이 외에도 아악정비를 위하여 악서를 편찬하고 조회아악과 회례아악을 제정하고, 제향아악을 정정하였다.

세종 대왕은 중국계 아악을 진작시키면서도 '우리 나라는 본시 향악을 익혀왔는데 종묘제향때 먼저 당악을 연주하고 겨우 셋째 잔 드릴 때 이르러 향약을 연주하니 조고(祖考)들이 평일에 듣던 음악을 아뢰는 것이 어떠한가?' '아악은 본래 우리 나라 음악이 아니고 실은 중국음악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살아 생전에는 향악을 듣고 죽으면 아악을 연주하니 어찌된 일이냐?' ' 우리 나라 음악이 비록 진선(眞善)은 못되나 중원(中原)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중원의 음악이라고 해서 또한 어찌 바르다고 하겠느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급기야 세종 27년(1445년) 용비어천가를 반포한 뒤를 이어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보태평, 정대업, 창수곡, 경근곡 등 신악(新樂)을 만들었다. 그 중 여민락은 거동음악으로 채택되고 보태평, 정대업은 세조 10년(1464) 이후로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지금가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향악을 기보하기 위한 정간보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

성종 24년(1493)에는 예조판서로서 음률에 밝던 성현과 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왕명에 의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악학궤범』은 조선 전기의 음악을 집대성한 악서로서 전부 9권3책으로 되어 있고 음악이론, 악기진설법, 무용, 악기, 의복, 의물 등에 대한 것을 총망라하고 있다. 이 『악학궤범』은 조선 후기에 전란으로 말미암아 음악을 복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의 음악기관은 건국초기에 종묘제례악의 악기연주를 관장하던 아악서와, 종묘제례악 등가의 노래와 일무를 맡은 봉상시(奉常寺), 연향에 쓰이는 당악과 향악의 연주활동을 맡은 전악서, 음악이론 연구와 악복 및 의례의 고증과 악서 편찬을 맡은 악학(樂學), 악공과 관현맹인(管絃盲人)과 여기(女妓)가 연주하는 향악과 당악의 실기연습을 맡은 관습도감(慣習都鑑)등 다섯 기관이 있었다. 이것들은 세조 3년 장악서와 악학도감으로 정비되고 세조 12년에 장악서로 통합되어 성종 때 장악원으로 계승되기까지 분산되어 있었다.

세조 3년 아악서와 전악서를 통합한 장악서의 직제를 보면 고려 이후 당악이 좌방(左坊), 향악은 우방(右坊)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아악연주를 맡은 악생이 좌방에,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는 악공은 우방에 소속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당악이 아악에 좌방의 위치를 빼앗기고 향악과 함께 우방에 통합됨으로써 당악기의 향악기화 또는 당악이 향악화는 가속되게 되었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 외에도 세조가 창안한 오음약보, 성현이 창안한합자보 등 새로운 기보방법이 개발되어 고려 때부터 사용되었던 육보, 율자보, 공척보와 더불어 많은 악곡들을 후대에 남겨주는데 큰 구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