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浦/◑ Panorama

전설

천지인야 2013. 2. 6. 17:03

 

  • 전설
  • 대감바위
    김포시 감정동 굿우물에 중봉(重峰)선생을 제향한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고, 이동네 좌측 벌판을
    동쪽으로 흘러 나진(예전의 나진나루터)을 지나서 한강 본류에 이르는 지류가 있다. 이 지류가 한강과
    합류하는 강기슭에는 조그마한 비뿌리가 있고, 강안에는 약 7~8평쯤 되는 넓은 바위가 강심 (江心)을 향해
    있어서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잔교와 같다. 그것은 나룻배나 어선의 이착에 매우 편리하게 이용되었다.

    운양동 감암포 (甘岩浦)에 있는 이 바위를 '감바위', 이 나루터를 '감바위 나루터'라 부르는데 이 바위에 서린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의 왜구침략설이 무시된 채, 조선조정은 당쟁에 편할 날이 없이
    국방을 소홀히 했다. 외침을 걱정하던 율곡(栗谷)선생은 10만 양병을 주장하다 받아 들여지지 않자
    고향 파주로 낙향하셨고, 율곡의 문인이었던 중봉선생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시다 뜻을
    이루지 못함에 벼슬을 버리고 굿우물에 낙향하셔서 자연을 벗삼아 우국지정(憂國之情)을 달래고 있었다.
    때로는 편주(扁舟)에 몸을 맡기고 나진나루터를 지나 한강변에 나가서 넓은 바위에 앉아 강심에 낚시를
    드리우고 장차 몰려올 왜구들의 노략질에 치를 떠셨고, 무심히 노니는 갈매기를 보면서 당쟁에 여념이 없는
    조정의 간신배 들의 작태에 한숨지으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으셨다.
    지당(池塘)에 비뿌리고 양류(楊柳)에 내끼인 제
    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夕陽)에 무심(無心)한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라
    평사(平沙)에 낙안(落雁)하고 황촌(荒村)에 일모(日暮)로다
    어선도 도아들고 백구(白鷗) 다 잠들 적에
    빈 배에 달 실어 가지고 강정(江汀)으로 가리라
    하루는 중봉선생께서 나루터 넓은 바위에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시름에 잠겼을 때 밀려오는 널판지를
    발견했다. 건져보니 그것은 우리나라 산 나무가 아니라 일본의 삼목(杉木)이었다. 중봉선생은 일본이
    많은 전선을 만들므로 해서 그 삼목의 조각들이 조수를 따라 떠밀려온 것임을 알고 그 널판조각에다
    그 사연과 함께 왜구의 침공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이 역시 무시되었다.

    급기야 임진년 4월에 왜구는 많은 전선을 이끌고 부산에 쳐들어온 지 불과 두 달만에 조선 천지를
    노략질하매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기 이르렀다.
    이때 관군은 물론, 의병들이 각처에서 일어나 왜구를 무찔렀다.
    중봉선생도 신난수(申蘭秀), 장덕개 (張德蓋)등 의병장들과 3천 의병을 거느리고 승병장 영규(靈圭)의
    5백 승병을 합해서 왜군에게 함락되었던 청주를 탈환하고, 그해 8월 금산 역시 탈환하였다. 그러나 수백의
    왜적과 싸우시다 중과부적으로 7백의 결사대는 끝내 순절(殉節)하고 말았다.

    현재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은 그분들의 넋을 모신 곳이며, 굿우물의 우저서원은 중봉선생을 제향한
    곳으로 우리고장의 자랑이자 정신적 지주로 삼는 곳이다.
    그리하여 중봉선생께서 생전에 우국지정을 달래며 낚시하던 운양동 한강변의 넓은 바위를 '대감바위'로
    불렀던 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대감바위의 대(大)자는 떨어져나가고 '감바위'로만 불리고 있다.
    현재는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여 중봉선생의 체취를 가까이서 느낄 수 없음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