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지역에서 밤에는 봉(烽:횃불)으로 낮에는 수(燧:연기)로 적군과 경계에 있는 곳에서 현장의 상황을 중앙과 각 지방의 군영에 급히 전달하는 군사통신체제인 봉수대(烽燧臺)가 5개(현재 2개는 서울과 인천지역임)씩이나 있었다.
우선 봉수는 전국적으로 경흥·동랠강계·의주·순천의 5개 봉수대 기점으로 하여
서울 목멱산(남산)의 제1봉에서 제5봉의 봉수대로 집결되었다.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강원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주 아차산(서울 강동구) 봉수대로부터,
제2봉 봉수대는 경상도에서 오는 봉수를 광주 천림산 봉수대로부터,
제3봉 봉수대는 평안·황해도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산 동봉의 봉수대로부터,
제4봉 봉수대는 평안·황해도의 해안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산 서봉의 봉수대로부터,
제5봉 봉수대는 전라·충청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천(서울 양천구) 개화산 봉수대로부터
각기 받았다.
이와 같이 전국에서 올라온 봉수의 정보는 목멱산(서울남산) 봉수대의 오원이
병조에 종합보고하면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김포지역의 봉수는 제5봉 노선으로서 전라도 순천에서 시작하여
수원, 안산, 인천, 부평 추곶봉화에서 김포의(지금은 인천시) 백석산 봉수, 수안산 봉수,
강화 대모성산 봉수, 강화 진강산 봉수 등 4개소를 거쳐 김포의 남산(월곶면)봉수,
김포 북변동의 냉정산봉수, 서울 양천의 개화산봉수, 서울 목멱산봉수(남산)로
최종 전달되었다.
현재 기준으로 김포지역의 대곶면 수안산봉수, 월곶면 남산봉수,
북변동 냉정산봉수의 역사적 내력을 살펴보자
먼저 수안산 봉수는 김포시 대곶면 율생리 산117번지의 해발 146.8미터인
수안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5기 연변봉수 직봉의 봉수로서 시대를 달리하여
‘수안성산봉수’, ‘약산봉수’ 등으로 호칭되었다.
이 봉수와 대응봉수의 노선 거리는 서쪽으로 강화 ‘대모성봉수’와 7.25키로,
남쪽으로 인천검단 ‘백석산봉수’와는 5.5키로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봉수는 조선초기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 경기ㆍ통진현 소재 2개소의 봉수중
1개소로서 ‘약산봉화’로 기술되어 있으며 ‘현의 남쪽에 소재하며
서쪽으로 강화 대모성, 남쪽으로 김포(인천검단) 백석산에 응한다’고 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수안성산봉화’ 명칭으로 서쪽으로 응하였던
‘대모성봉수’의 명칭이 ‘대모산성’으로 변화가 있었다.
조선후기 <동국여지지>(1656)의 기록내용도 이와 같으나 다만 서쪽으로 응하던
‘대모산성 봉수’명이 ‘대모성산’으로 변할 뿐이다.
<여지도서>(1760)의 봉수 예에는 ‘수안산성봉화’ 명으로 구체적인 위치와
대응봉수노선 및 거리 등을 알 수 있다.
<경기지>의 (통진부읍지)(1842-43)에는 현재의 ‘수안산봉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도비지>(1849-64)에는 수안산이 즉 수안고성임을 표기하고 있으며
<대동지지>(1862)에는 수안산이 수안고성내에 있음을 표기하고 있다.
한편 이 봉수의 봉수군 인원은 <강화부지>(1871)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수안산봉수’는 남쪽으로 ‘백석산봉수’, 서쪽으로 강화 ‘대모산봉수’에 응하며 봉수군 103명,
봉수장 4인, 감관 10인, 감고 2인, 오장 10인, 군 40인 등 대응봉수외에
169명의 많은 봉수군이 배속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1908)에는 제5거 직봉의 ‘수안산봉화’ 명칭으로 통진에 속하여
경기수사 소관의 봉수였음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현재 봉수는 수안산성 동문지 우측에 서-동 방향으로
약 4개소의 원형석축봉돈 흔적이 미약하게 남아있다.
가장 서쪽 높은 곳에 있는 1봉돈은 중심에 철봉이 박혀 있으며 원형으로 미약하나마
봉돈의 윤곽이 확인된다.
2봉돈은 1봉돈과 3미터의 거리를 두고 석재를 원형으로 돌려 봉돈시설을 하였다.
3봉돈은 4개소의 봉돈 중 상태가 제일 양호하며 1.5×1.6미터의 크기로 40×10센치,
30×15센치 가량의 화강석재를 이용하여 봉돈시설을 하였다.
4봉돈은 원형의 토축이다.
1봉돈에서 4봉돈까지 각 봉돈간의 중심거리는 3미터(1-2봉돈), 7미터(2-3봉돈),
4.6미터(3-4봉돈)이며 1-4봉돈간 전체 길이는 14.6미터의 소형이다.
‘남산봉화’는 김포시 월곶면 군하리 323번지 해발 180.2미터 주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현 김포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산봉화’ 혹은 ‘군하리봉화’로 불려지고 있다.
‘주산봉화’와 대응봉수의 노선의 거리는 동쪽의 김포 ‘주산봉수’와는 13키로,
서쪽 강화 ‘송악(남산)봉수’와는 9키로의 거리에 있다.
이 봉수는 <세종실록>의 지리지에 경기 통진현 소재 2개소의 봉수 중 1개소로서
‘주산봉화’ 명으로 동쪽으로 김포 주산, 서쪽으로 강화 송악에 응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현에서 5리의 거리이며 동쪽으로 김포현 북성산,
서쪽으로 강화부 송악산에 응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주산에서 ‘남산봉화’로의 명칭변경과 대응봉수도 동의 김포주산에서
동의 김포현 북성산으로 바뀐것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1760)에는 위치의 표시외에 각 대응봉수의 구체적인 거리를 알 수 있다.
<경기지>의 ‘통진부읍지’(1849-64)와 <대동지지>(1862)에도 봉수의 위치에는 변함이 없다. 이 남산 봉수의 봉수군 인원은 103명이라고 <강화부지>(1871)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1908)에는 김포 북변리의 ‘냉정산봉수’를 경유하여
제5거 ‘개화산봉수’에 최종 전달되는 직봉의 ‘남산봉수’ 명칭으로 동 군의
‘냉정산봉수’와 같이 경기수사 소관의 봉수였음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냉정산봉수’는 김포시 북변동 해발 150.3미터 장릉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5거 ‘연변봉수’ 직봉의 봉수로서 시대를 달리하여
‘주산봉수’, ‘북성산봉수’ 등으로 호칭되었다.
대응봉수노선의 거리는 서쪽으로 통진 ‘주산봉수’와 13키로, 동쪽으로
‘개화산봉수’와는 9.5키로의 거리에 있다.
이 봉수는 <세종실록>의 지리지(1454)부터 조선후기의 각종 읍지에 바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다양한 명칭의 변경 및 대응봉수 노선에 변화가 많았던 봉수이다.
여기에는 경기 김포현에 소개하는 2개소의 봉수 중 1개소로서 ‘주산봉화’ 명으로
서쪽으로 통진주산, 동쪽으로 양천 개화산에 응한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봉수 조에서 종전의 ‘주산봉화’에서 ‘북성산봉화’로
봉수명칭의 변화뿐만 아니라 대응봉수 명칭의 변화(서의 통진 주산에서 남산) 등을 알수 있다. 산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봉수가 위치하는 북성산이 현의 북쪽2리에 있는데 진산이라 하였다.
조선후기 <여지도서>(1760)에는 종전의 ‘북성산봉화’에서 ‘냉정산봉화’로 명칭의 변경 및
위치의 변화(현의 북쪽 2리에서 군의 남쪽 3리 소재) 등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여도비지>(1856)와 <대동지지>(1864)에는 ‘냉정산봉수’가 북쪽 1리 지점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이 봉수에 속한 봉수군 인원은 <강화부지>(1871)에 봉수군 95명, 봉수장 2인, 감관 10인,
오장 5인, 군 40인, 감고 2인하여 총 154명의 많은 인원이 배속되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증보문헌비고>(1908)에는 제5거 ‘개화산봉수’에 최종 전달되는 직봉의 ‘냉정산봉화’ 명칭으로 양천 ‘개화산봉수’에 최종 응하는 봉수이며 동 군의 ‘남산봉수’와 같이 경기수사 소관의
봉수였음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