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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풍속

천지인야 2013. 2. 7. 00:29


 

  세시풍속이란?

  세시풍속은 계절에 맞추어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행위를 뜻한다. 대명절이 되면 오랜 관습에 의해서 몸을 단장하고 새음식을 장만하여 조상과 제신에게 제사하는 등 여러가지 행사가 있다. 이러한 행사는 반복되는 관습이기 때문에 세시풍속이라 한다.
  세시풍속이 생활에 정착된 시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사람들에게 공감대, 필요성, 당위성을 형성함으로써 관습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시풍속은 넓은 지역이나 민족단위로 나타난다. 이러한 대단위는 그만큼 공감에 의해서 채택되고 토착화해서 전파되고 전승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한번 토착하면 생활양식이나 의식에 큰 변화가 없는 한은 오래 지속되기 마련이다. 넓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복되는 생활관습일 수록 그 세시풍속은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세시 풍속이란 말은 연중 행사라는 말로 바꾸어 써도 무방한 말이다. 우리 나라는 주로 농업을 해왔기 때문에 농촌 생활에 알맞은 연중 행사를 지내 왔다. 해마다 계절에 따라 일정한 시기에 같은 행사를 되풀이 했고 부지런히 일 할 수 있는 힘을 여기에서 얻었다. 그리고 세시 풍속은 지금도 우리 국민 생활에 리듬을 주어 단조로운 생활에서 명절이 오기를 고대하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며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문명 국가이며 그 세시 풍속의 주류는 이미 아득한 부족 국가 시대부터 이루어져서 지금까지 유구한 전통을 이어 왔으며 각종 명절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것은 본래 농사철을 따라 지내오던 고대의 행사였던 만큼 종교성을 띤 경우가 많았는데 처음엔 신을 즐겁게 하려던 것이 인간도 같이 즐기게 되었고 오히려 지금은 사람들이 스스로 즐기려는 경향이 더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시 풍속에는 신앙성과 놀이가 뒤섞여 있다. 세시 풍속은 한반도 전체가 거의 같지만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징도 찾아 볼 수 있다.

 

 

 

 

 

 

 

 

 

 

 

 

 

 

 

 

 

 

 

 

 

 

 

 

 

 

 

 

 

 

 

 

 

 

 

 

 

 

 

 

 

 

 

 

 

 

 

 

 

 

 







 

 

설차례와 세배

정초의 차례는 아침에 지내는 간단한 제사를 의미하며 돌아가신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를 모신다.
조반이 끝나면 아이들은 어른들께 세배를 하고 어른들은 덕담을 들려 준다.
세배로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과 아이들간의 질서를 유지해 온 미풍양속이다

세찬과 세주

세찬은 세배 온 손님에게 대접하는 차례 음식의 총칭이다.
세주는 정월 초하루에 마시는 술을 말하며 이 술은 데우지 않고 차게 마시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세주를 마심으로써 괴질(병의 원인을 알 수 없어 병명을 붙일 수 없는 병)을 물리치고 일년내 재운이 따른다고 믿고 있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한국 청소년들의 대표적인 겨울철 놀이의 하나이다.
한국 연은 모양에 따라 70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다. 놀이의 방법은 높이 띄우기, 상대방 연줄 끊기, 재주 부리기, 액연 날리기 등이 있다.

윷놀이

윷놀이는 놀이 기구가 간단하고 남녀의 구별없이 실내나 옥외에서 할 수 있는 놀이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성행된 놀이이다.
놀이 방법은 윷판을 놓고 윷을 던져서 나온 결과대로 말 4개를 진행시키고, 먼저 4개의 말이 모두 최종점을 통과하는 편이 이기는 것이다. 윷의 종류는 크게 장작윷과 밤윷으로 구분하는 데 남도 지방은 작은 밤윷으로 장종지기 속에 윷을 넣어 던지면 바닥에 떨어지는데 “도” “개” “걸” “윷” “모”로 구별되고 그에 따라 말을 쓴다.
윷놀이의 형성 시기는 여러 문헌을 살펴볼 때 삼국 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널뛰기

널뛰기는 매우 힘이 들고 활달한 운동이지만 남자의 놀이가 아니고 여자들이 하는 놀이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놀이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옛날에는 부녀자들이 울 안에서만 생활하였기 때문에 이 놀이를 통해서 허공에 높이 올라갔을 때 담장 밖의 세상을 살폈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지금도 소녀들이 정초에 널뛰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빛깔도 찬란한 설빔으로 단장한 부녀자들이 새해의 공중을 번갈아 뛰어 오르고 내리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놀이 방법은 높이 뛰기, 오래 뛰기 등이 있다.

안택

정월의 보름 전후로 많은 가정에서는 안택이라고 하는 행사를 하는데 이 행사는 집안의 모든 일이 일년 내내 편안하기를 기원하는 행사이다.
신곡으로 술을 빚고 시루떡을 만들며 과일들을 장만해서 성주신께 올리고 부엌의 여신 조왕 할머니, 뒷 곁의 터줏대감 순으로 고사를 드리는데 사제자는 독경을 잘 하는 소경이나 무녀가 맡는다.
이때에 액막이 지푸라기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액땜의 돈을 약간씩 주머니에 넣어서 동구 밖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놓아 두었다

쥐불 놀이

주로 사내 아이들이 음력 정초부터 보름날 전후까지 벌이는 불놀이다.
밤에 논두렁이나 둑에 있는 마른 풀에 불을 질러 태우며 뛰논다.쥐불 놀이는 놀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논이나 밭두렁에 있는 모든 해충을 태워 없애고, 타버린 뒤의 재가 그대로 거름이 되어 새싹이 잘 자라게 해준다는 밝은 의미가 있다.

귀밝이 술과 부럼

보름날 아침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귓병이 생기지 않으며 일년 내내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또 호두나 잣, 은행, 밤, 땅콩 등을 이로 소리나게 깨물어 먹으면 이가 강해지고 종기와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보름날 아침에 부럼깨기를 한다.

한식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을 한식이라 부르고 4대 명절(설, 한식, 추석, 동지)로 삼아 왔다.
한식날 조상의 무덤 앞에 과일, 떡, 술을 차려 놓고 제사 지내는 일이 많다. 또한 무덤이 헐었을 때에는 다시 잔디를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라고 한다.

삼짇날과 화전 놀이

3월 3일은 삼짇날이라고 한다.강남 갔던 제비가 옛집에 찾아 들고 나비들도 꽃을 찾아 날아드는데 사람들은 나비점을 치기도 한다.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처음 보면 좋고 소원이 이루어지는데 반해 흰나비를 보면 부모상을 당한다고 꺼린다. 삼월 삼짇날을 전후로 산과 들에는 꽃이 피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산에 만발한 진달래 꽃을 뜯어다가 쌀가루에 반죽하고 참기름을 바르고 지져서 먹는다. 이것을 꽃전 또는 화전이라 한다.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끼리 경치 좋은 산에 가서 음식을 먹어 가며 춤과 노래로 하루를 즐기는 풍속이다.

초파일과 관등 놀이

4월 8일은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이며, 이 날을 흔히 “초파일”이라 부르고 절에서는 “욕불일”이라고 해서 부처님 목욕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옛부터 초파일에는 등불을 많이 달고 즐기는 풍속이 있어서 이 날을 “등석” 또는 “관등절”이라 하여 경내에 수 백 수 천 개의 등불을 매달고 스님과 보살들의 염불 행렬로 밤을 새우는데 이것을 관등 놀이라고 한다.

단오

단오란 말은 초닷새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고대 중국의 음양 사상에서 짝수는 음으로 홀수는 양으로 치는데 양이 겹친 중일은 생기가 있는 날이고, 그 중에서도 5월 5일은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로 천중가절이라 하였다. 이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칼에 윤기가 생기고 빠지지 않으며 소담스러워진다고 해서 특히 부인들이 그렇게 해 왔다. 남도 지방에서는 익모초를 뜯어다 생즙을 내서 먹으면 여름철 식욕이 왕성해진다고 하여 민간 의약으로 애용되기도 한다.

씨름

씨름은 가장 남성적인 놀이이자 서민적인 놀이이다. 방식은 샅바를 매고 무릎을 꿇은 뒤, 상대편의 다리와 허릿바를 부여 잡고 마주서서 심판의 신호에 따라 기술과 힘으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이다. 경기의 기술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배지기” “잡치기” “뒤집기” “오금 당기기” “무릎치기” 등이 대표적이다.

그네 뛰기

단오날 씨름이 남자들이 하는 경기라면 그네는 여자들이 즐기는 놀이이다.
그네는 신록이 싱싱하게 물들어가는 단오에 전개되는 아름다운 한국적인 풍경임에 틀림없다.
그네는 마을 어구의 큰 나뭇가지에 밭줄을 매어 놓고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나와 뛰고 놀게 하였다. 대개 사월 초파일을 전후해서 매어 놓고 오월 단오절에 이르는 약 한 달 동안 계속되며, 단오날에 그네뛰기 대회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유두

유월 보름날을 유두날이라고 한다.
유두라는 말은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한문구에서 두 글자만을 딴 것이다. 고대인들은 물이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고 정화의 힘이 있다고 믿었다. 농업이 주업인 우리 나라에서는 이날 논귀에 음식들을 호박잎에 쌓아 묻어서 지신에 축원하는 행사도 있었다.

  칠석

칠월 칠일을 칠석이라고 한다.
이 날 밤 처녀들은 직녀성과 견우성에게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비는 풍속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견우성과 직녀성이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사랑을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은하수를 건널 수가 없어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두 별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까치와 까마귀가 칠석날 하늘에 올라가 은하수에 오작교를 놓아주고 서로 만나게 해주는 날이라고 전한다.

추석

팔월 보름날을 추석 또는 한가위라고 한다.
이 때가 되면 농사 일이 거의 끝나고 이른 곡식은 먹을 수가 있으니 풍년을 즐길 수가 있다.
어른들은 추석 이삼일 전부터 조상의 묘에 찾아가 풀을 베고 묘를 보살피는 등 성묘를 한다.
추석 날이 되면 모두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새 곡식으로 떡과 술을 만들어 차례를 지낸다.
또한 산소에 찾아가 잔을 올리고 조상의 은혜에 감사를 드린다.

중구

9월9일을 중구 또는 중앙이라고 한다.
중구라고 하는 것은 9가 중복됐다는 뜻으로 중구가 되면 늦가을철이 되어 국화가 만발하는데 꽃잎을 따서 국화전을 부치고 국화주를 만들어 먹는다.

동지

동지는 낮이 가장 짧은 날로 흔히 음력 11월을 동짓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만큼 동지가 11월을 대표하고 있다는 뜻이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사당에 놓고 차례를 지낸 뒤 대문벽이나 집 뒤안, 소마구 등에 뿌리고 난 후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는다. 팥죽이 액을 막고 잡귀를 물리쳐준다는 관습에서 온 민속이다.

섣달 그믐

일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0일을 부르는 말이다.
이 날은 한 해의 마지막을 넘기는 때인 만큼 주고 받은 금전 거래를 정리하고,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며 집안 곳곳에 불을 켜 놓고 잠을 자지 않은 채 새해를 맞는 등의 여러 가지 관습과 행사가 이루어졌다



 잡절(雜節)과 세시풍속

 구정(舊正)

음력 정월 초하루를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도 그렇지만 중국, 동남아 일대에서는 아직도 구정을 중시하는 풍속이 두터웁다.

   원소절(元宵節)

음력 정월 보름을 이르는 말이다. 쥐줄놀이와 오곡밥, 부럼깨물기등의 풍속이 아직도 활발하게 지켜지고 있다.

   춘사(春社)

입춘후의 다섯번째 무(戊)일이다. 토신(土神)을 제사지내어 풍농을 기원한다.

   한식(寒食)

동지후 105일에 해당하는 날이다. 이 날은 질풍심우가 있는 절후로 전후 3일간 불을 때는것을 금하고, 미리 장만해 놓은 찬 음식을 먹고 투계등의 놀이를 행한다.

   삼진(三辰)

음력 3월 3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날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여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는 길한 날이다.

   단오(端午)

음력 5월 5일로 옛날 부터 농작의 풍년을 기원하던 제삿날이었으나, 지금은 주로 농촌의 명절로써 수리취를 넣어 둥글게 절편을 하여 먹고, 여자는 창포믈에 머리를 감기도 하며 그네를 뛰며, 남자는 씨름을 하고 논다. 이 날을 단양, 중오절, 천중절, 수리, 수릿날이라고도 한다.

   복날(伏)

초복, 중복, 말복의 세 날이 있는데 초복은 하지후 삼경일(三庚日)이고, 중복은 사경일(四庚日)이고, 말복은 입추후 초경일(初庚日)이다. 속에서 중복에서 10일째가 말복이 되어야하는데 그 중간에 입추가 끼이지 않으면 20일째 되는날이 말복이 된다. 이것을 월복(越伏)이라한다. 복날에는 개를 잡아먹는것이 풍속인양 되었으나 속가의 일이었고, 사대부집안에서는 쇠고기를 얼큰하게 끓인 육개장을 개장국 대신으로 먹었고, 그외에도 삼계탕, 계절과일등을 넉넉히 먹어 더위에 지친 몸을 보하였다.

   유두(流頭)

음력 6월 15일이다. 신라 풍속에 이 날 나쁜 일을 덜어버리기 위해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았다 한다. 수단을 시원하게 만들어 먹고, 농촌에서는 논에가서 용신제를 지내어 풍농을 빈다.

   칠석(七夕)

음력 7월 7일 밤이다. 견우와 직녀가 일년에 한번 상봉하는 날로 전해지며, 무속과 불가 에서는 명절중의 명절로 하늘의 칠성님이 강림하시는 날이라하여 성대한 칠석마지 정성을 올린다.

   백중(百中)

음력 7월 15일이다. 허물을 대중앞에 들어 내어 말하여 참회를 구하며, 특히 이 날은 제 지옥문이 모두 열리는 날이라하여 여물대로 여문 오곡백과를 거두어 조상님전에 제사를 올린다. 백종(百種), 백중(百衆), 중원(中元)이라고도 부르며, 불가에서는 우란분절이라고도 부른다.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이다. 구절초를 따다 엮어 말려 두었다가 약으로 쓴다. 특히 이 날은 주인없는 혼령들을 제사 지내면 좋다는 습속에따라 무자조상들의 제사나 돌아가신 날짜를 모르는 선영의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다.

 납향(臘享)

동지후의 제 삼미일(三未日)이다.한해를 거두는 날로 그 해 동안 지은 농사 형편과 그 밖의 여러가지 일을 신에게 고하는 제사이다.

 제석(除夕)

음력 섣달 그믐날 밤을 말한다. 이 날이 지나면 구정인데 이 날 잠을 자면 눈썹이 희게 된다고 하며 집안팎에 불을 밝혀 놓고 밤을 새며 새해가 되기를 기다린다.

 

정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동짓달   섣달   윤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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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월

□ 설 날

  설은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로 명절 중의 명절이다. 설날은 예로부터 신일(愼日)이라 했는데, 일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 때문에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날은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모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이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설빔으로 옷을 갈아입고, 차례를 지낸다. 또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으로 새해 인사를 교환한다.
  설날의 세찬(歲饌) 중에는 떡국이 가장 대표적이며, 여러 종류의 강정을 만들어 먹는다.
  그 밖에 정초에 행해지는 풍속에는 복조리 사기, 신발 훔쳐 간다는 귀신을 쫓는 야광이 쫓기, 쥐를 없애기 위해 첫 쥐날[子日]에 빈 방아를 찧는 빈방아찧기, 부잣집 흙을 훔쳐 부뚜막에 바르면 부잣집의 복이 따라온다고 해서 행하던 복토 홈치기 등이 있었으나 없어진 지 오래다.
  정초에 행해지는 민속놀이에는 널뛰기, 연날리기, 윷놀이 등이 있어 왔으나, 이 중 널뛰기는 1960년대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연날리기와 윷놀이는 아직도 행해지고 있다. 1980년대부터는 집집마다 '고스톱'이라는 화투놀이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설날은 일제 시대 이래 '신정(新正) 쇠기' 정책에 밀려 '구정(舊正)'으로 전락하면서 한 때 풍속의 혼란이 생기고 명절 분위기가 퇴색된 적이 있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 '민속의 날'로 지정되고, 다시 1990년부터 '설날'로 명칭을 되찾음은 물론 이 날을 전후로 사흘 연휴가 되면서 추석과 더불어 우리 민족 2대 명절로 자리잡았다.

□ 정월 대보름

  정월 15일은 전통적으로 큰 명절이었다. 이 날에는 약밥이나 오곡밥을 해 먹고, 귀밝이술을 마시며, 동제를 지내고, 달맞이를 하는 등 갖가지 풍속이 이어왔다.
  귀밝이술은 이 날 아침에 술을 마시면 귀가 귓병을 앓지 않고 밝아지며, 한 해 동안 좋은 것을 듣는다고 하여 마시는 술인데, 한자로 적어 명이주(明耳酒)라고도 한다. 지금도 포항의 일부 가정에서 행해지고 있다.
  더위팔기는 보름날 아침에 일어나 해가 뜨기 전에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 개의 목에 걸어 주고, 왼새끼를 꼬아 소의 목에 매어 주면서 더위를 먹지 말라 이르며, 마을에서는 벗이나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사람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내 더위 사라"라며 한 해 동안 더위를 먹지 않기를 기원하는 풍속인데, 없어진 지 오래다.
  포항 지방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이 날 새벽, 부락의 안녕과 풍농,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동제를 지낸다.

  보름날의 절정은 달맞이에 있다. 달이 뜨기 전 뒷동산에 올라가서 생솔가지를 꺾어 모아 불은 지로고, 그 연기로 달을 그을린다. 달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달 봐라"라고 고함을 지르고, 다른 사람들은 달을 향해 일제히 큰절을 하며 각자의 소원을 기원한다. 이 놀이를 달불놀이라 한다. 그러나 산불의 위험에 따른 금지 조치와 달의 영험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1970년대이래 이 놀이는 중단돼 버렸다.

  달이 뜰 무렵, 다리[橋]가 있는 곳으로 가 자기 나이 수만큼 다리를 밟는 다리밟기 풍습도 있었는데,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다.
  보름에 행해지는 민속놀이로 지신밟기를 빼놓을 수 없다. 지신밟기는 집안의 무사안녕과 복을 빌어 주기 위해 마을의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풍물을 울리고 자신을 밟아 주는 의식으로 지금도 잘 전승되고 있다.
  대보름의 민속놀이로 이 밖에 쥐불놀이와 줄다리기를 들 수 있는데, 이 중 쥐불놀이는 아직 상당수 마을의 어린이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으며, 줄다리기는 송라면 화진리 이진 마을에서 전승되고 있다.
  대보름날에 벌어지는 아이들의 주술적 행위로 대보름놀이를 빼놓을 수 없다. 음력 정월 14일, 수수깡으로 보리, 콩, 밀 등을 만들어 놓고, 보름날 새벽 거름에 가져다 놓거나 꽂아둔다. 그리고 아침밥으로 찰밥을 먹고 밭에 가서 곡식을 까먹는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후여 딱딱 꼭두박새여 오늘만 까먹고 내일일랑 정에 정도령 장개 가는데 콩나물 대가리 얻어 묵으러 가자(부분)"하고 부르는 <새쫓는소리>를 부른다. 이윽고 보름달이 둥그렇게 돋아오면 농작물을 해치는 기생식물인 새삼을 예방하기 위해 "새삼밭에 불어여 꼬두박밭에 불이여"하고 부르는 <새삼없애는소리>를 부르고, 달불놀이를 마찬 다음에는 거름 위에 두었던 수수깡을 짚신에 담으면서 "헤헤 화이요 잘도친다 화이요"하고 <보리타작소리>를 하면서 타작하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는 "멫 섬 났노 되바라 서런닷섬 났다 우루는 마흔섬 났다 두지 하자"하면서 되로 되는 시늉을 한다. 짚신에 곡식을 되어서는 마루 밑에 갖다 둔다. 이튿날 아침에 이 짚신과 곡식을 버리는 것으로 풍연을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날의 주술 행위는 끝난다.

□ 입 춘

  입춘은 '봄빛이 서는 날'이라는 뜻으로 24절후의 첫째 절후다.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이며, 음력으로는 빠르면 섣달에 있을 때도 있으나, 주로 정월에 있다. 입춘에는 "立春大吉 建陽多慶", "開門萬福來 閉門三災厄" 등의 춘축(春祝)을 써서 기둥에다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가정을 제외하고는 입춘과 관련된 풍습은 거의 소멸된 상태다.

□ 발렌타인데이

  발렌타인데이(Balentine Day)는 양력 2월 14일며, 원래 서기 269년 로마의 사제(司祭) 성 발렌타인의 순교를 기념하여 유럽에서 행해지던 제일(祭日)로, 이 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의 보내는 풍습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와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형태로 정착되었으며, 우리 지방에서도 1980년대 말부터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하루 전날인 2월 13일에는 초콜릿을 판매하는 상점이 크게 붐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3월 14일에는 반대로 발렌타인데이에 여자로부터 선물을 받은 남자가 보답하는 의미의 선물을 하는 날인 화이트데이(White Day)이다. 이 날 우리 지방의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은 사탕을 준비하였다가 초콜릿을 받은 보답으로 여학생에게 선물한다.

□ 삼재 면하기

  삼재란 운성(運星)의 하나로 사람이 출생하여 9년마다 든다고 하며, 삼재가 드는 첫 해를 들삼재, 2년째를 묵삼재, 3년째를 날삼재라 한다. 이 해에 해당하는 사람은 화를 면하기 위해 정초에 삼두매[三頭鷹]가 그려진 부적을 문 위에 붙이는 풍습이 있다.

2 월

□ 영등날

  영등날(음력 2월 1일)이라 함은 하늘에 사는 영등 할머니를 모시는 날이다. 바람과 물과 불을 관장하는 신인 영등 할머니는 이 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20일에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는 반드시 며느리나 딸을 데리고 온다고 하는데,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시샘을 하기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쳐 큰 피해를 준다고 한다. 또 이 기간을 내월(來月)이라 하여 혼인을 피하는 풍습이 있다.
  이 날 아침 일찍 새 바가지에 맑은 물을 담아 장독대, 광, 부엌에 올려놓고 복을 빈다. 또, 오곡밥과 나물을 장만하여 부엌에 차리고 가정의 식구 수에 맞춰 소지(燒紙)를 만들어 식구 순위대로 이름과 나이를 소개하며, 불을 붙여 하늘로 띄우면서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이 때 장만한 나물과 밥을 짚으로 만든 오제기에 싸서 울타리에 얹어 두고 까치가 먹게 하였다.
  그리고 묵은 쑥으로 쑥떡을 만들어 먹으며, 쑥떡을 짚단으로 싸서 광에 넣어 두기도 하였는데, 이를 두지떡이라 하였다.
  이월 명절을 머슴날이라고도 한다. 가을 추수가 끝난 후 겨울을 쉬고 이월 명절이 지나면 한 해의 고된 농사가 시작되므로 머슴을 위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머슴으로 하여금 즐겁게 놀고 쉬게 하기 위해서 주인은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한턱 내는데, 이 때 머슴들은 풍물을 울리면서 닷새 동안 즐겼다고 한다.
  이월 초하룻날은 또 콩을 볶는 날인데, 솥에 콩을 넣고 "새알 볶아라, 쥐알 볶아라, 굼벙이 볶자"하면서 주걱으로 젓는다. 볶은 콩은 먹기도 하지만 집 안팎에 뿌리기도 하였다. 이 날 콩을 볶는 주술적 행위를 하는 이유는 농사에 해를 주는 새, 쥐, 벌레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다.
  이월 초하룻날은 대청소를 하는 날이기도 한데, 집안의 거미줄도 걷어내고, 가축 우리의 두엄도 걷어낸다. 이월이 지나 날씨가 풀리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노내각시라는 벌레가 생기므로 이 벌레를 막기 위하여 "香郞閣氏速去千里"라는 한자문구를 적어서 벽이나 기둥, 서까래에 거꾸로 붙이기도 하였다.
  현재 포항 지방에서의 이월 명절을 집집마다 쑥떡을 해 먹는 형태로 남아 있으며, 어촌 지역에서는 아직도 이 날을 중히 여긴다. 이 날 기계면 화대리에서는 숲뒤 마을과 방축 마을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벌이는 전통이 내려온다.

3 월

□ 삼짇날

  음력 3월 3일을 말한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날씨가 온화해지며, 산과 들에는 꽃이 피기 시작하는 날이라 하여 사람들은 야외에 나가 하루를 즐긴다. 특히 만발한 진달래꽃을 따다가 화전(花煎)을 지져 먹으며 노는데, 이 놀이를 화전놀이라 한다. 지금 우리 지방 농촌에서는 마을 사람들끼리 관광 버스를 전세 내어 여행을 떠나는 풍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 한식(寒食)

  한식은 동지(冬至) 후 105일째가 되는 날로 양력 4월 5일경이 되는데, 청명(淸明)이나 식목일과 겹치는 수가 많다. 이 날은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조상의 묘소에 성묘를 하고, 무덤에 잔디를 입히는 등 무덤 손질을 한다. 그리고 이 날은 예로부터 더운 밥을 먹지 않고 찬밥을 먹었다 한다.
현재 우리 지방에서의 한식은 무덤을 손질하는 풍습만 남아 있을 뿐, 그 외의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4 월

□ 초파일

  음력 4월 초파일은 석가모니의 탄신일로 흔히  부처님오신날이라고 하며, 불탄일(佛誕日)이라고도 한다. 이 날 각 사찰에서는 큰 재(齋)를 지내고 제등행렬(提燈行列)을 벌이는 등 갖가지 행사를 베푼다. 또 불교 신도들은 절에 가서 법회에 참석하고 집안 식구들의 소원 성취를 위해 연등을 단다.

5 월

□ 단 오

  음력 5월 5일은 단옷날이다. 전통적으로 단오는 우리 나라 4대 명절의 하나이며, 수릿날 또는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한다.

  이 날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즐겁게 노는 날이었다. 남자들은 씨름대회를 열었고, 여자들은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창포 뿌리를 깎아 비녀를 지르고 천궁잎을 꽂은 머리로 그네를 뛰면서 놀았다.
  현재 포항 지방에서 단오와 관련된 풍습은 부녀자들이 머리에 천궁잎을 꽂는 풍습으로만 남아 있을 뿐 다른 풍습은 찾아보기 힘든 편인데, 청하면 미남리에 마을 단위로 그네뛰기 등의 행사를 전승하고 있다. 단오 민속을 계승하기 위해 포항문화원에서는 이 날 보경사에서 단오민속축제를 연다.

6 월

□ 유두(流頭)

  유두는 음력 6월 15일을 말하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인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의 약칭이다.
  이 날 사람들은 햇과일과 밀가루떡을 장만하여 조상께 제를 올리고, 음식을 장만하여 맑은 시내와 산간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며 하루를 즐겼는데, 이는 액을 면하고 더위를 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지방에 유두와 관련된 풍습은 거의 없어진 상태다.

□ 삼복(三伏)

  삼복은 초복, 중복, 말복을 말하는데, 24절기 중 소서(小暑)를 지내고 나서 천 경일(庚日)이 초복, 둘째 경일이 중복, 셋째 경일이 말복이다. 만일 셋째 경일에 입추(立秋)가 지나지 않으면 넷째 경일이 말복이 되며, 이런 경우를 흔히 월복(越伏)이라고 한다.
  이 무렵은 일 년 중 가장 더울 때다. 각 가정에서는 수박을 사 먹으며, 삼계탕이나 보신탕을 먹어 지틴 몸에 원기를 돋워 준다. 가족 단위로 해수욕장이나 산간 계곡을 찾자 피서를 즐기는 풍습은 근래에 정착되었다.

7 월

□ 칠석(七夕)

  칠석(음력 7월 7일)은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1년에 한 번 만난다는 전설에 의거한 날로 예로부터 여러 가지 풍속이 있어 왔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여름 장마 뒤의 옷가지와 책을 햇볕에 쬐어 말렸는데, 이것을 쇄서폭서( 書曝書)라 했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칠석차례[七夕茶禮]'라 하여 약수터를 찾아 물을 맞으며 샘에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다. 흥해읍 약성리 장성 마을의 '장성 수레탕'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지금은 마을 단위로 버스를 대절하여 약수탕을 찾는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다.

□ 백중(百中)

  음력 7월 15일을 말하며, 백종(百種) 또는 중원절(中元節)이라고도 한다. 이 날 사람들은 약수터를 찾기도 하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기도 한다. 또 농부들은 이 날 여름 농사를 마치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지방에서 백중과 관련된 풍습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8 월

□ 추 석

  음력 8월 15일을 말하며, 한가윗날 또는 중추절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의 가배로부터 유래한 이 날은 전통적으로 우리 나라의 가장 큰 명절이었으며, 특히 1980년대 중반 사흘 연휴가 되면서 명실공히 우리 나라 최대의 명절로 각광받고 있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새 옷을 입고 객지로부터 귀향한 일가친척들과 함께 햇곡식으로 만든 송편을 빚어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며, 하루를 즐겁게 논다. 해안 마을에서는 부녀자들이 월월이청청을 하였으나 일제말에 중단되었으며, 장기면 모포리에서는 줄다리기가 전승되고 있다.

9 월

□ 중양절

  음력 9월 9일을 중양절(重陽節) 또는 중구일(重九日)이라 한다. '구(九)'자를 양수(陽數)의 극이라 하는데, 이러한 양기(陽氣)의 존중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날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산과 들고 나가 하루를 즐겼다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지방에서 중양절과 관련되어 전하는 풍습은 거의 없다.

10 월

□ 상달제

  음력 10월을 상달이라고 한다. 1년 중 가장 높은 달이라는 것이다. 초순에 술과 떡을 장만하여 성주, 삼신, 용신 등 집안의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 때 떡을 해 먹는 풍속이 아직 우리 지방에 전해지고 있다.

□ 묘사(墓祀)

  묘사는 1년 동안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두게 된 것이 조상의 은덕이라 생각하고 5대 이상의 묘소에 가서 제사 지내는 풍속으로, 시사(時祀)라고도 하며, 아직도 우리 자방에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풍습이다.

동 짓 달

□ 동지(冬至)

  24절기 중의 하나로 양력 12월 22일경이며,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이 날에 연유하여 11월을 동짓달이라 한다. 우리 지방 각 가정에서는 이 날 찹쌀로 단자를 해 넣은(이것을 '새알심'이라 한다) 팥죽을 쑤어 먹는다. 쑨 팥죽을 방, 마루, 광 같은 데 한 그릇씩 떠놓으며, 잡귀를 쫓기 위해 대문이나 벽에 뿌리는 풍속도 전한다.

□ 성탄절(聖誕節)

  양력 12월 25일을 말하며, 예수의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흔히 크리스마스(chtistmas)라 한다. 8.15광복 후 새로운 세시풍속으로 굳어졌다. 이 날 각 교회와 성당에서는 성탄(聖誕)을 축하하는 갖가지 행사를 벌인다. 도 이 날을 전후하여 곳곳에 성탄목(聖誕木 ; 크리스마스 트리)이 장식되고, 사람들은 성탄찬미가(聖誕讚美歌 ; 크리스마스 캐럴)를 즐겨 들으며, 존경하는 분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보내기도 한다.

섣   달

□ 해맞이

  양력 1월 1일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풍습으로, 1990년대에 들어와 일반화되었다. 이 날 일출을 남보다 먼저 보려고 동해안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데, 12월 31일 밤부터 1월 1일 아침까지 포항 지역의 해안도로는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는다. 특히 1999년 1월 1일에 대보면 등대박물관 옆에 서 제1회 영일만 해맞이 축제가 열렸고, 2000년 1월 1일에는 국가 행사인 한민족 해맞이 축제가 열리게 됨에 따라 이 지역이 동해안의 대표적인 해맞이 명소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 섣달 그믐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제석(除夕) 또는 '작은 설'이라도 한다. 이 날 객지에 나가 있는 일가친척들이 설을 쇠기 위하여 귀향을 한다. 민간에서는 이 날을 수세(守歲)라 하여 가족들이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속설이 있어 자지 않고 밤을 세며, 집안 곳곳에 불을 밝혀 잡귀가 범하지 못하게 한다. 어른들에게 묵은세배를 드리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모여 망년회(忘年會)를 열기도 한다. 한 해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거래를 청산하는 경제적 풍속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윤   달

  윤달은 평년보다 한 달 더 있는 달로 '공달'이라고도 한다. 윤달이 있는 해를 윤년(閏年)이라고 하며, 이 해에는 열두 달 가운데 어느 한 달이 겹치게 되는데, 4월이 겹칠 경우 겹친 달은 특히 '윤사월'이라 한다.
  윤달에는 무슨 일을 해도 아무 탈이 없다고 했다. "성장을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탈이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어떤 일을 해도 부작용이 없다는 민속적인 의미를 지닌 달이다. 윤달에는 집을 수리하거나 혼례를 많이 치른다. 또 노인이 있는 집에서는 수의(壽衣)를 만들기도 한다. 그 밖에 이장(移葬)을 하는 등 부정과 동티를 두려워하는 일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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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은 새해의 첫머리이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다. 묵은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해의 첫날을 말하는데, 어원(語源)은 '설다'·'낯설다' 등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새해에 대한 낯설음, 즉 새해라는 문화적인 시간인식 주기에 익숙하지 못한 속성을 가장 강하게 띠는 날이 바로 설날이다. 즉 설은 새해라는 문화적 시간의 충격이 강하여 '설다'는 의미로, '설은 날'로 생각된다.

  설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과정으로, 새해에 통합되기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한 단계이다. 바로 이 점에 '설다'는 의미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각종 세시기(歲時記)들에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기술되어 있는 것도 새해라는 시간 질서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조심하고 삼가야 된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설은 새해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날이므로 삼가고 조심해야만 순조롭게 새해에 통합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 시간이다.

  설은 새해의 첫날이란 뜻의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세초(歲初)', '수세(首歲)', '연두(年頭)', '정초(正初)' 등의 한자어로 부르기도 한다. 제석(除夕, 섣달그믐)을 마지막으로 묵은해는 지나가고 '설날'을 시점으로 새해가 시작되니, 1년의 운수는 그 첫날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옛사람들은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몸가짐으로 복(福)을 기대하여 연초인 설날에 몸과 마음을 근신했다.

  정월은 농촌에서는 농한기요, 새해가 시작되는 달이기도 하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자연 환경은 이 시기에 모든 식물의 생장이 중단되지만, 인간에게는 새로운 생장의 계절이 오기를 기다리게 한다. 이때는 새로운 시간의 창조를 위한 신성 의례와 건강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얻기 위한 여러 가지 축원, 점세(占歲)의 의례를 행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설날의 풍속>

* 설빔[歲粧] : 설날 아침에 갈아입는 새옷을 말한다.

* 차례(茶禮) : 설날 아침 일찍 음식[歲饌]과 술[歲酒]을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 세배(歲拜) : 차례가 끝나고 어른께 드리는 새해 첫인사. 세배를 마치고 어른에게는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아이들에게는 과자와 세뱃돈을 준다.

* 세찬(歲饌) : 설날 차례와 손님 접대를 위해 준비하는 여러 가지 음식, 대표적으로 떡국이 있다. 그밖에도 전·강정·수정과·식혜·약과 등의 음식이 있다.

* 세주(歲酒) : 설날에 마시는 술로 찬술을 그대로 마신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세주는 데우지 않은데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歲酒不溫 寓迎春之意]" 하는 설명이 있다.

* 덕담(德談) : 새해를 맞아 서로 복과 소원 성취를 기원해 주는 말이다.

* 복조리 : 설날의 이른 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넘었을 때 사서 벽에 걸어 두는 조리. 조리는 쌀을 이는 기구인데 그 해의 복을 쌀알과 같이 조리로 일어서 취한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풍속으로 보인다. 조리 장수는 조리를 팔기 위해 섣달 그믐날밤에 "복조리 사시오, 복조리오!" 하고 외치면서 밤새도록 골목을 돌아다닌다.

2. 대보름

 음력 정월 보름날. 한자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이란 중원(中元, 음력 7월 15일, 백중날)과 하원(下元, 음력 10월 15일)에 대칭 되는 말이다. 대보름날은 우리의 세시풍속에서 가장 중요한 날로 설만큼 비중이 크며, 민속놀이와 세시 행사들이 가장 많이 행해진다.

  대보름날에는 절식(節食)으로 약밥, 오곡밥, 묵은 나물과 복쌈·부럼·귀밝이술을 먹으며, 기풍(祈豊)·기복(祈福) 행사로 볏가릿대 세우기·복토(福土) 훔치기·용알뜨기·다리밟기·나무시집보내기·백가반(百家飯) 먹기·나무아홉짐하기·곡식안내기 등을 행한다. 또한 이날 행해지는 농점(農占)으로는 달집태우기·사발점·그림자점·달불이·짚불이·소밥주기·닭울음점 등이 있으며, 이날 행해지는 제의와 놀이로서는 지신밟기·별신굿·안택고사·용궁맞이·기세배(旗歲拜)·쥐불놀이·사자놀이·관원놀음·들놀음 등이 있다. 그리고 이날에는 고싸움·나무쇠싸움 등의 각종 편싸움이 행해지고, 제웅치기·나무조롱달기·더위팔기·개보름쇠기·모불놓기·방실놀이·뱀치기 등의 액막이와 구충행사(驅蟲行事)도 행해진다.

   <대보름날의 풍속>

* 달집태우기 : 정월 대보름날 밤 달이 떠오를 때 생솔가지 등을 쌓아올린 무더기에 불을 지르며 노는 풍속.

* 부럼깨기 : 밤처럼 딱딱한 껍질을 가진 열매를 '딱' 소리가 크게 나도록 깨문다. 일 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고 치아가 튼튼해져서 건강한 한 해를 보낼 수 있다고 여겼다.

* 더위팔기 : 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누구든 사람을 보면 먼저 이름을 불러 상대방이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라" 한다. 이렇게 더위를 팔면 그 해에는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일명 '매서(賣暑)'라고 한다.

* 귀밝이술[耳明酒] : 새벽에 맑은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눈이 잘 보인다고 한다. 어린이에게도 귀밝이술을 마시게 한다.

* 다리밟기 : 대보름날 밤에 다리[橋]를 밟으면 다리병[脚病]을 앓지 않는다고 하여 경향 각지에서 성행하던 세시 풍속이다. 일명 '답교(踏橋)', '답교놀이'라고도 한다.

*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첫 보름달이 뜨는 밤에 하는 것이 원칙이다.

* 소밥주기[農占] : 대보름날 아침에 찰밥과 나물을 키에 담아 가지고 외양간에 가서 소에게 준다. 소가 밥과 나물 중 어느 것을 먼저 먹는가에 따라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 달맞이 :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농악대의 상쇠가 악기를 울리면 달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소망을 빌었다.

* 달점: 달의 빛깔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붉으면 가뭄, 허옇게 비추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 쥐불놀이 : 홰에 불을 붙여 빙빙 돌리면 불꽃이 원을 그리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데, 요즘은 깡통 속에 불을 넣고 하는 게 보통이다.

* 동제(洞祭) : 마을 공동체의 신에게 제를 올린다.

3. 한식(寒食)

  한식(寒食)은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로, 음력 2월 또는 3월에 든다.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이르고, 3월에 드는 해는 철이 늦다. 그래서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어도 3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하는 말이 전해진다. 한식 때는 조상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무덤이 헐었으면 떼를 다시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改沙草)'라고 한다. 묘 둘레에 나무를 심기도 한다.

  한식은 언제나 청명(淸明)을 전후한 시기에 든다. 이때는 양력으로 4월 5, 6일쯤으로 나무심기에 알맞은 시기이다. 우리나라에서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하여 나무를 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와 각 능원(陵園)에 제향했고, 민간에서는 술·과일·포·식혜·떡·국수·탕·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지낸다.

  한식의 유래에는 몇 가지가 있다. ①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나라에서 새불[新火]을 만들어 쓸 때 그에 앞서 어느 기간 동안 묵은 불[舊火]을 일체 금하던 예속(禮俗)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②중국의 옛풍속으로 이날은 풍우가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③<개자추 전설(介子推傳說)>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개자추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애첩 여희(驪姬)에게 빠진 진(晉)나라 헌공(獻公)이 왕위를 애첩 소생인 해제(奚齊)에게 물려주려고 태자 신생(申生)을 죽이자 겁이 난 동생 중이(重耳)는 진을 떠나 1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뒷날 그는 귀국하여 왕이 되었는데, 바로 진 문공(晉文公)이다. 즉위한 뒤 문공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면서 그만 개자추(介子推, 또는 介之推)를 빠뜨리고 말았다. 개자추는 망명 시절 문공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먹인 적이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개자추는 단념하고 어머니와 함께 면산(綿山)에 들어가 은거하고 말았다. 이를 뉘우친 문공이 개자추를 불렀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다. 문공은 개자추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지르게 했다. 그러나 개자추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어머니와 함께 새카맣게 타 죽어 있었다. 이에 문공은 애통한 나머지 면산을 개산(介山)으로 봉하고 그가 죽은 날을 기려 이날에는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이날 더운밥을 먹지 않고 찬밥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한식날부터 농가에서는 채소 씨를 뿌리는 등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든다. 흔히 이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만 아니라 국가에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믿어 매우 꺼렸다.

4. 삼짇날

  음력 3월 초사흗날. '삼월살질'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상사(上巳)·원사(元巳)·중삼(重三), 또는 상제(上除)라고도 쓴다. 또 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하는데, 이날 들판에 나가 꽃놀이를 하고 새 풀을 밝으면서 봄을 즐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삼짇날은 3의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로 봄철의 시작을 장식하는 명절이다. 강남 갔던 제비도 옛집으로 돌아오고 동면하던 뱀도 땅 속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다. 이날 흰나비를 보면 부모의 상을 당한다고 하고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보면 길하다고 한다. 제비를 보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하며 뱀을 보면 운수가 길하다고 한다. 장을 담그면 장맛이 좋고 호박을 심으면 잘 되고 약수를 마시면 연중무병하고 아무리 집안 수리를 해도 무탈하다고 한다. 머리를 감으면 물이 흐르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소담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머리를 감는다.

  또한 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해서 둥근 떡을 만들고 기름에 지져 먹는데, 이 떡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국에 띄우고 거기다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음식을 먹는데, 이 음식을 '화면(花麵)'이라 한다. 더러는 진달래꽃을 꺾어다가 녹두가루와 반죽하여 만들기도 하며, 붉은 색으로 물을 들이고 꿀물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을 '수면(水麵)'이라고 한다. 이 음식들은 시식(時食)으로 제사에도 쓰인다.

  이날 사내아이들은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논다. 계집아이들은 물곳풀을 뜯어서 대나무 쪽에다 풀 끄트머리를 실로 매고, 머리를 땋아 가느다란 나무로 쪽을 찌고, 헝겊조각으로 대쪽에다 노랑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만들어 입혀 새각시 모양을 하고, 요·이불·베개·병풍을 차려 놓고 '각시놀음'을 하고 논다. 또 이날에는 '활쏘기놀음[弓術會]'·'닭쌈놀이' 등을 한다.

5. 단오

  음력 5월 5일. 일명 수릿날[戍衣日·水瀨日]·중오절(重午節)·천중절(天中節)·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끝과 처음이라는 뜻이 있고, '오(午)'자는 '오(五)'자와 음이 통하여 단오란 '초닷새'라는 뜻이 된다. 단오는 일 년 중에서 가장 양기(陽氣)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여겨져 왔고 여러 가지 행사가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단오는 시기적으로 더운 여름을 맞기 전인 초하(初夏)의 계절이며,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祈豊祭)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단오 행사는 북쪽으로 갈수록 번성하고 남쪽으로 갈수록 약해지는데, 남쪽에서는 단오 대신 추석 행사가 강해진다. 또한 단오는 중종 13년(1518)에 설날·추석과 함께 '삼대 명절'로 정해진 적도 있었다.

  단오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 때부터이다. 굴원(屈原)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해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이었다. 그 뒤 해마다 굴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단오가 되었다고 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이날 밥을 수뢰(水瀨 : 물의 여울)에 던져 굴원을 제사지내는 풍속이 있으므로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산에서 자라는 수리취[狗舌草]라는 나물을 뜯어 떡을 한다. 또 쑥으로도 떡을 해서 먹는데 떡의 둥그런 모양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아서 수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수리란 우리말로 수레[車]라는 의미 외에도, '높다', '위', 또는 '신(神)'이라는 뜻도 있어서 '높은 날', '신을 모시는 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날 여자들은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뜻에서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였으며, 창포 뿌리로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기도 하였다.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칼이 소담스럽고 윤기가 난다고 하는데, 이 창포탕에 쑥을 넣어서 삶기도 한다.

  또 이날 익모초와 쑥을 뜯어 두는 풍속이 있다. 여름에 익모초를 달여서 즙을 먹으면 매우 쓰지만 식욕을 얻는다고 해서 민간의 약으로 태곳적부터 동서양에서 써 왔다. 이날 또한 민속놀이로서 남자들은 씨름과 활쏘기를 하여 승부를 겨뤘고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하여 단오 명절의 성황을 이루었다.

   

6. 유두(流頭)

  음력 6월 보름으로, 복중(伏中)에 들어 있으며 '유둣날'이라고도 한다. 이날은 일가 친지들이 맑은 시내나 산간 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후, 가지고 간 음식을 먹으면서 서늘하게 하루를 지낸다. 이것을 '유두잔치'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에 질병을 물리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 풍속은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고려 희종(熙宗) 때의 김극기(金克己)가 지은 글에 "동도(東都, 경주)의 풍속은 6월 15일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감아 액을 떨어버리고, 술 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중경지(中京志)≫ 권2 풍속조에도 보이며, ≪고려사(高麗史)≫ 명종(明宗) 15년조에는 6월 병인(丙寅)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崔東秀)와 더불어 광진사(廣眞寺)에 모여 유두음(流頭飮)을 마련하였다. 나라 풍속은 이 달 15일 동류수에 머리를 감아 불상(不祥)을 없앴는데, 이 회음(會飮)을 유두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동류수에 머리를 감는 것은 동쪽이 청(靑)이며,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두'란 일반적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 때 옛말의 뜻을 취한 이두(吏讀)로 표기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소두(梳頭)·수두(水頭)라고도 표기하였는데, 수두란 물마리(마리는 머리의 옛말)로서 '물맞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신라의 옛땅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유두를 물맞이라고 부른다.

  유두 무렵에는 참외, 수박 등의 과일이 새로 나기 시작한다. 이날 아침에 각 가정에서는 유두면·밀전병·수단(水團)·건단(乾團), 그리고 피·조·벼·콩 등 여러 가지 곡식을 새로 나온 과일과 같이 사당에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내는데, 이를 '유두천신(流頭薦新)'이라 한다. 사당에 유두천신을 하고 나면 식구들이 그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날 먹는 수단은 멥쌀가루를 쪄서 만든 떡을 꿀물에 넣고 얼음에 채워서 먹는 것이고, 밀전병은 빈대떡처럼 부친 것이다.

  유두는 새로운 과일이 나고 곡식이 여물어 갈 무렵에 몸을 깨끗이 하고 조상과 농신(農神)에게 정갈한 음식물로 제를 지내며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우리 민족의 오랜 풍속 중의 하나이다.

  

7. 칠석

음력 7월 7일을 칠석(七夕)이라고 한다. 각 가정에서는 밀전병과 햇과일을 차려 놓고, 부인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장수(長壽)와 집안의 평안을 빈다. 또한 이날 처녀들은 직녀성에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고 소년들은 학업 성취를 빌었다. 마을에서는 서낭당 등에서 자녀의 무병과 장수를 빌기도 한다. 장마가 지난 때라 그 동안 축축해진 옷과 책을 볕에 쬐는 거풍(擧風)의 풍속도 있었다.

  이날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오작교(烏鵲橋)에서 1년에 한 번 만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남녀의 사랑이 얽힌 전설이 있기에 남녀상사의 애정시나 설화에도 칠석과 관련된 것이 많다. 음력 7월이면 아직 노염(老炎)은 남아 있지만 여름은 기가 꺾여 갈 때이다. 북두칠성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비단결같은 은하수는 쏟아질 듯 화려하다. 그 동쪽에는 수줍은 듯 희미하게 비치는 직녀성이 있고, 서쪽에는 남성적인 눈이 찬란하게 빛나는 견우성이 있다. 서로 마주보며 마치 정겨워 하는 것과도 같다.

이날의 절식(節食)은 대개 여름 음식 그대로이지만 밀국수와 밀전병은 반드시 상에 오른다. 왜냐하면 이날이 지나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밀가루 음식은 이미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이때가 마지막 밀음식 향연이 되는 셈이다. 이후부터 밀가루음식은 철 지난 것으로 밀냄새가 난다고들 한다.

  한편 중부지방의 무속에는 '칠석맞이'라는 것이 있다. 단골무당에게 자녀의 무사성장을 기원했던 부인들이 자녀의 수양 어머니인 단골무당을 이날 찾아간다. 무당은 기원의 상징인 명다리를 내어 바람에 불리고 다시금 자녀의 무사성장을 기원하며, 어머니들은 쌀을 놓고 둥그렇게 촛불을 켜 놓은 상위에서 자녀의 무사성장을 기원한다.

   <견우직녀 설화>

  시기적으로 매년 칠월칠석이 되면 견우·직녀성이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그 위치가 매우 가까워지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설화가 생겨났다.

  원래 직녀는 천제(天帝)의 손녀로 길쌈을 잘하고 부지런했으므로, 천제가 매우 사랑하여 은하수 건너편의 하고(河鼓)라는 목동(견우)과 혼인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신혼의 즐거움에 빠져 매우 게을러졌으므로 천제는 크게 노하여 그들을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다시 떨어져 살게 하고 한해에 한 번 칠월칠석날에만 같이 지내도록 했다. 은하수 때문에 칠월칠석날도 서로 만나지 못하자, 보다 못한 지상의 까막까치들이 하늘로 올라가 머리를 이어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 다리를 '까막까치가 놓은 다리', 즉 '오작교'라 하며, 칠석이 지나면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져 돌아온다고 한다. 또한 이날 오는 비는 '칠석우(七夕雨)'라 하여 그들이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며, 그 이튿날 아침에 오는 비는 이별의 눈물이라고 전한다. 이 설화는 칠월칠석의 민속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 정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이야기이다.

   

8. 추석

  음력 8월 15일. 추석(秋夕)은 한가위, 가위, 가배(嘉俳, 嘉排), 중추절(仲秋節)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농경 민족인 우리 조상들에는 여름 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들이 익어 수확을 거둘 계절이고, 1년 중 가장 큰 만월(滿月)을 맞이하였으니 즐겁고 마음이 풍족하였다.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아서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므로 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하여라' 하는 말도 생겨났다.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삼국시대 초기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제2대 유리왕 때 도성 안의 부녀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왕녀가 각기 거느리고 7월 15일부터 8월 한가윗날까지 한 달 동안 길삼 짜기를 하였다. 마지막 날에 심사를 해서 진 편이 이긴 편에게 한턱을 내고 <회소곡(會蘇曲)>을 부르며 놀았다고 한다. 오랜 전통이 있는 추석 명절에는 여러 가지 행사와 놀이가 세시풍속으로 전승되고 있다.

  추석날 아침 일찍 일어나 첫번째 하는 일은 차례를 지내는 것이다. 주부가 며칠 전부터 미리 준비한 제물을 차려 놓고 차례를 지낸다. 이때는 설날과 달리 떡국 대신 햅쌀로 밥을 짓고 햅쌀로 술을 빚고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차례를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가을 수확을 하면 햇곡식을 조상에게 먼저 천신(薦新)한 다음에 먹는데 추석 차례가 천신을 겸하게 되는 수도 있다. 차례가 끝나면 차례에 올렸던 음식으로 온 가족이 음복(飮福)을 한다.

  추석날에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서 성묘를 한다. 추석에 앞서 낫을 갈아 가지고 산소에 가서 풀을 깎는데 이를 '벌초(伐草)'라 한다. 여름 동안 자란 풀이 무성하고 시들어 산불이라도 나면 무덤이 타게 되므로 미리 풀을 베어 주는 것이다. 어쩌다 추석이 되어도 벌초를 하지 않은 무덤은 자손이 없어 임자 없는 무덤이거나 자손은 있어도 불효하여 조상의 무덤을 돌보지 않는 경우여서 남의 웃음거리가 된다. 이처럼 추석 명절에 차례와 성묘를 못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자손된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의식 구조이다.

 

   <추석의 풍속>

* 벌초 : 대개 추석 전에 조상의 묘를 찾아가서 풀을 베는 풍속이다.

* 송편 : 햅쌀로 빚은 달떡으로 속에는 콩, 팥, 밤, 대추 등 그해에 수확한 것을 쓴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예쁜 배우자를 만나게 되고, 밉게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하여 총각·처녀들은 솜씨를 뽐낸다.

* 강강술래 : 남도지방에서는 추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강강술래 놀이를 한다. 추석날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달이 솟을 무렵 젊은 부녀자들은 넓은 마당이나 잔디밭에 모여 손과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춤동작은 노래 장단에 따라 달라지며, 원무(圓舞) 이외에도 여러 놀이가 첨가되어 다양하게 전개되는 수도 있다.

* 소놀이 : 두 사람이 멍석을 쓰고 앞사람은 방망이 두 개를 들어 뿔로 삼고, 뒷사람은 새끼줄을 늘어뜨려 꼬리를 삼아 농악대를 앞세우고 이집저집 찾아다닌다. 일행을 맞이하는 집에서는 많은 음식을 차려 일행을 대접한다. 마당에서 술상을 벌이고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한때를 즐긴다.

* 거북놀이 : 두 사람이 둥근 멍석을 쓰고 앉아 머리와 꼬리를 만들어 거북 시늉을 하고 느린 걸음으로 움직인다. 사람들이 거북을 앞세우고 큰 집으로 찾아가 "바다에서 거북이가 왔는데 목이 마르다" 하면서 음식을 청하고 들어가면 주인은 음식을 내어 일행을 대접한다. 한 집에서 잘 먹고 난 다음 다른 집으로 찾아간다.

9. 중양절 

  음력 9월 9일. 중구(重九)라고도 한다. 중양은 양이 겹쳤다는 뜻이니 양수인 홀수가 겹친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도 다 중양이 될 수 있겠으나, 중양이라고 하면 중구를 가리킨다. 중구는 음양철학적인 중일명절(重日名節)의 대표적인 명절이었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상국(賞菊)·등고(登高)·시주(詩酒)로 즐겨온 날이었다. 당·송(唐宋)대에도 관리들의 휴가일로 추석보다도 훨씬 성대한 명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부터 안압지의 임해전(臨海殿)이나 월상루(月上樓)에서 군신이 중구에 연례적으로 모여서 시가를 즐긴 듯하다. 고려시대에는 중구의 향연이 국가적으로 정례화 하였다. 내외 신하들과 송나라·탐라·흑수(黑水)의 외객들까지 그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중삼(重三)·중구(重九)를 명절로 공인하고, 성종 때에는 추석에 지내던 기로연(耆老宴)을 중구로 바꾸어서 지내기도 했다.

이날 각 가정에서는 화채(花菜)와 국화전, 국화주를 만들어 먹었다. 중양절 때는 단풍이 곱게 물드는 계절로, 등고와 상국에 알맞은 시기이다. 지금도 이 무렵에는 단풍구경꾼이 매우 많다. 그러나 중구의 명절의식은 지금 거의 보이지 않는다.

10. 제석(除夕)  

  1년의 마지막 날(음력 12월 30일)인 섣달 그믐날 밤. 제야(除夜)라도 부른다. 한 해를 마감하는 '덜리는 밤'이라는 뜻이다. 섣달 그믐을 속칭 '작은 설'이라고 하여 묵은세배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즉 그믐날 저녁에 사당에 절을 하고, 어른들에게도 세배하듯 절을 하는데, 이를 '묵은세배[舊歲拜]'라 한다. 이는 1년의 마지막 순간에 한해가 무사히 간다는 뜻으로 드리는 인사이다. 이로 인하여 이날은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오고가는 사람의 등불이 끊이지 않았다.

  밤에는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여 잠을 자지 않았는데 이를 '해지킴[守歲]'라고 하였다. 밤을 지샐 때는 윷놀이·옛날이야기·이야기책 읽기 등 흥미 있는 놀이를 하였다.

  한편 세모(歲暮)에는 옛날부터 생치(生雉)·생전복·대추·생선알·육포(肉脯)·마른생선·감자·귤·건시(乾枾) 등을 친지들 사이에 주고받는데, 이것을 '세찬(歲饌)'이라고 한다. 세찬이나 차례를 위한 음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주부들은 밤을 새우다시피 한다. 이때 남자들은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다. 또한 세밑의 바쁜 중에도 각 집마다 부뚜막 헌 곳이 있으면 새로 고치고, 외양간도 치우고 고치며, 거름도 퍼내어 설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믐날 마당을 깨끗이 쓸어 그 쓰레기를 이용하여 마당 한 구석에 모닥불을 피우는데, 이는 모든 잡귀를 불사른다는 신앙적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한해 동안의 거래 관계를 이날 모두 청산하는 관행이 있었다. 따라서 이날 각 가정에서는 새해의 준비와 1년 동안의 거래 청산에 몹시 분주해지고, 밤중까지 빚을 받으러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기만 하면 정월 보름까지는 빚을 독촉하지 않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구정(舊正)
음력 정월 초하루를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도 그렇지만 중국, 동남아 일대에서는 아직도 구정을 중시하는 풍속이 두터웁다.

원소절(元宵節)
음력 정월 보름을 이르는 말이다. 쥐줄놀이와 오곡밥, 부럼깨물기등의 풍속이 아직도 활발하게 지켜지고 있다.

춘사(春社)
입춘후의 다섯번째 무(戊)일이다. 토신(土神)을 제사지내어 풍농을 기원한다.

한식(寒食)
동지후 105일에 해당하는 날이다. 이 날은 질풍심우가 있는 절후로 전후 3일간 불을 때는것을 금하고, 미리 장만해 놓은 찬 음식을 먹고 투계등의 놀이를 행한다.

삼진(三辰)
음력 3월 3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날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여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는 길한 날이다.

단오(端午)
음력 5월 5일로 옛날 부터 농작의 풍년을 기원하던 제삿날이었으나, 지금은 주로 농촌의 명절로써 수리취를 넣어 둥글게 절편을 하여 먹고, 여자는 창포믈에 머리를 감기도 하며 그네를 뛰며, 남자는 씨름을 하고 논다. 이 날을 단양, 중오절, 천중절, 수리, 수릿날이라고도 한다.

복날(伏)
초복, 중복, 말복의 세 날이 있는데 초복은 하지후 삼경일(三庚日)이고, 중복은 사경일(四庚日)이고, 말복은 입추후 초경일(初庚日)이다. 속에서 중복에서 10일째가 말복이 되어야하는데 그 중간에 입추가 끼이지 않으면 20일째 되는날이 말복이 된다. 이것을 월복(越伏)이라한다. 복날에는 개를 잡아먹는것이 풍속인양 되었으나 속가의 일이었고, 사대부집안에서는 쇠고기를 얼큰하게 끓인 육개장을 개장국 대신으로 먹었고, 그외에도 삼계탕, 계절과일등을 넉넉히 먹어 더위에 지친 몸을 보하였다.

유두(流頭)
음력 6월 15일이다. 신라 풍속에 이 날 나쁜 일을 덜어버리기 위해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았다 한다. 수단을 시원하게 만들어 먹고, 농촌에서는 논에가서 용신제를 지내어 풍농을 빈다.

칠석(七夕)
음력 7월 7일 밤이다. 견우와 직녀가 일년에 한번 상봉하는 날로 전해지며, 무속과 불가 에서는 명절중의 명절로 하늘의 칠성님이 강림하시는 날이라하여 성대한 칠석마지 정성을 올린다.

백중(百中)
음력 7월 15일이다. 허물을 대중앞에 들어 내어 말하여 참회를 구하며, 특히 이 날은 제 지옥문이 모두 열리는 날이라하여 여물대로 여문 오곡백과를 거두어 조상님전에 제사를 올린다. 백종(百種), 백중(百衆), 중원(中元)이라고도 부르며, 불가에서는 우란분절이라고도 부른다.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이다. 구절초를 따다 엮어 말려 두었다가 약으로 쓴다. 특히 이 날은 주인없는 혼령들을 제사 지내면 좋다는 습속에따라 무자조상들의 제사나 돌아가신 날짜를 모르는 선영의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다.

납향(臘享)
동지후의 제 삼미일(三未日)이다.한해를 거두는 날로 그 해 동안 지은 농사 형편과 그 밖의 여러가지 일을 신에게 고하는 제사이다.

제석(除夕)
음력 섣달 그믐날 밤을 말한다. 이 날이 지나면 구정인데 이 날 잠을 자면 눈썹이 희게 된다고 하며 집안팎에 불을 밝혀 놓고 밤을 새며 새해가 되기를 기다린다.

 

우리 나라의 명절

설 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첫날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에요.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해 아침에입는 새 옷인 "설빔"을 입고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절을 드리는 "차례"를 지내지요. 그런다음 나이가 많은 어른들에게 부터 새해 인사인 "세배"를 하지요. 세배를 할 때에는 새해 첫날을 맞아서 서로의 행복을 빌고 축복해 주는 "덕담"을 주고 받지요.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떡국으로 아침을 먹지요. 이렇듯 새해 첫날인 설날은 하루 종일 복을 빌고 좋은 말을 많이하고 들으면 일 년 내내 그러하고,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면 일년 내내 배부르다고 해요. 그러니 앞으로 다가오는 설날에는 더욱 아름다운 말씨와 마음씨를 가져야 겠지요?

정월 대보름

음력 1월 15일인 정월 대보름 아침에 일찍 일어나 땅콩이나 호두를 깨무는 것을 "부럼 깐다"라고해요. 부럼은 딱딱한 껍질로 된 과일을 말해요. 호두나 잣,땅콩 같은 것들이지요.또 "부스럼"의 준말로 피부에 생기는 종기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요즘은 먹을 것도 다양하고 좋은 음식도 많아 부스럼이 나지 않지만 옛날에는 영양 상태가 좋지 않다보니 피부에 버짐이 피기도 했지요. 그런데 땅콩이나 호두 같은 열매에는 그런 부스럼을 막아주는 영양소가 쌀보다 수십 배나 많이 들어있어 아이들에게 이것을 미리 먹여 일 년 동안 피부병에 걸리지 않게 하려고 했으니 정말 지혜로운 조상님들 이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달이 밝은 밤을 신비롭게 여겼어요. 특히 보름날 밤에는 둥근 달을 보며 더욱 흥겨워 했지요. 그래서 일 년 중에서도 첫 번째 찾아오는 정월 보름은 더욱 소중히 여겨서 "대보름" 이라고 부르게 된 거예요. 정월 대보름날 뜨는 보름달을 보며 한 해의 소원을 빌며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농부들은 풍년이 들기를 빌곤 했지요. 다음 정월 대보름이 돌아오면 여러분도 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 보세요. 먼 옛날부터 조상들의 소원을 들어 온 달님이니 아마 우리들의 소원도 꼭 들어 줄 거예요.

한식

중국 춘추 시대 문공이라는 왕자가 있었어요.임금이 죽고 왕실이 어지러워지자 문공은 멀리 다른 나라를 떠돌게 되었어요.문공에게는 여러명의 신하가 있었는데 그 중 개자추라는 무척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었어요. 그는 문공이 먹을 것이 없어 며칠을 굶어 쓰러지자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잘구 구워 먹일정도로 문공에게 충성 스러운 신하였다.훗날 문공은 진나라의 임금이 되었었어.문공은 그를 도와 주었던 개자추를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어요.훗날 문공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신하로 하여금 개자추를 불러 오게 하였지만 개자추는 산에서 내려 오질 않자, 신하들과 궁리끝에 산에다 불을 질러 산에서 내려 오게 하였으나 개자추는 그의 어머니와 내려 오지 않고 끝내 불에 타 죽고 말았지요. 문공은 너무 마음이 아파 개자추의 충성심을 위로하고자 해마다 오늘이면 하루동안 불을 지피말도록하였다. 그 날 이후로 한식날에는 불에 타 죽은 개자추의 넋을 위로 하고자 불을 지피지 않고 찬밥을 먹는다고 해요.한식은 동지가 지나고 1백 5일째가 되는 날이예요.이 때는 농촌이 한창 씨를 뿌릴 때이기 때문에 특별한 놀이를 하지않고 조상의 묘를 찾아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지요. 한식날은 양력으로 보면 4월 5,6일쯤이 돼요.식목일과 비슷때이지요.이 때가 일 년 중 나무를 심거나 씨를 뿌리기에 가장 알맞아 농가에서는 일년 농사의 처음으로 생각했어요.한식날 무렵은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은 건조기이지요. 이럴때 성묘하러가서 불을 쓰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렇듯 한식은 건조한 날씨에 잘 맞는 명절이예요. 불을 조심하고 잘 관리하는 날로 한식날이면 개자추의 슬픈 넋과 위험한 불을 잘 다스렸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생각해 보세요.

단 오

음력 5월 5일 이예요. 우리 조상들은 홀수가 두 번 겹치는 날은 생기가 넘친다고 해서 길한 날이라고 생각했어요. 단오는 다른말로 "술의날"또는 "수릿날"이라고도해요."술의"나 "수리"는 우리 말로 수레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농사짓던 농민들에게 수레는 무척 중요한 기구여서 단옷날 먹는 떡도 수레 모양으로 만들었대요.단오에는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여러 가지 놀이를 했는데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남자들은 씨름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거의 바깥에 나가 돌아 다닐 수가 없었지만 단오날 만큼은 옷을 곱게 차려 입고 하루 종일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었다.단오는 제사의 뜻을 가지는 명절이기도 해서 새로 시작한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날이었던 것이지요.또 이때부터는 비가 자주오는 계절로 접어들기 때문에 나쁜 병이 번지쉬워 여러가지 풍습이 생겨났어요.단오날 남녀 모두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나쁜 귀신과 질병을 쫓을 수 있다고 믿었지요.단오는 음력5월이니 슬슬 무더위가 시작되는 무렵이예요.사람들은 부채를 서로 선물하면서 올해도 더위를 타지 말고 건강하라는 소망도 함께 선물 했다.또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해서 단오날 정오에 대추나무 가지를 치거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아 더 많은 열매가 열리기를 기원하는 풍습도 있었다. 지금은 단옷날을 잘 지키지 않고 언제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리는데 이제부터는 달력에 표시를 해 두고 지켜 보세요. 쑥떡을 해먹고 그네도 뛰면서 또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를 해 보아도 재미 있을 거예요.

유 두

음력 6월 15일을 "유두"라고 해요.한창 더운 계절에 들어 있는 명절로 음력 6월은 "썩은달"이라고 했는데 비도 자주 오고 더위가 가장 심해 음식도 금방 변해 썩은 달이라고 한거예요.농사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백성들이 모처럼 몸을 씻고 머리를 감을 수 있는 시간이 된 명절이 바로 유두날이에요.보통 때에는 여자들이 밖에서 옷을 벗고 몸을 씻는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그러나 유두날 만큼은 얼마든지 씻을 수가 있었지요.유두는 "수두"라고도 했는데 수두는 "물맞이"이라는 말이 되었는데 유두가 몸을 씻는 날이니 서로 뜻이 맞다고 할 수 있겠지요? 유두에는 우선 새로 나온 오이나 참외 같은 과일을 따고 국수를 만들어서 사당에 제사를 드렸어요.그 동안 농사를 잘 보살펴 준 조상이나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이지요.유두날엔 찰떡이나 밀떡을 해 논이나 밭에 가서 한 덩이씩 놓고 농사가 잘 되기를 빌기도 했어요.이것으로 옛 어른들이 얼마나 농사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갔는지 잘 알게 해 주는 풍습이에요.유두날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고 건강하게 여름을 날수 있다고 생각 했지요.또 밀가루를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 오색 물감으로 알록달록 색을 입혀 예쁜 색실에 꿰어 차고 다니면 나쁜 액을 막을 수가 있었데요.이렇게 유두에는 곡식이 자라나고 날씨가 더운 계절에 있는 명절답게 거기에 잘 어울리는 풍습들이 있지요. 일 년 중 가장 더운 계절인 음력 6월에 몸을 씻는 명절이 돌아오는 것을 보면 우리의 명절이야말로 가장 과학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칠월 칠석

먼 옛날 옥황 상제에게는 직녀라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어요.직녀는 하루 종일 베짜는 일만 하며 살고 있었어요.직녀가 짠 옷감은 정말 눈 부실 만큼 아름다웠어요.ㅈ어느날 직녀는 베 짜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창밖을 내려다 보다가 무심코 은하수 건너편의 청년을 보고 첫 눈에 반해 곧 옥황 상제에게 달려가 그 청년과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하자 "허허 .견우 말이로구나." 하면서 옥항 상제는 견우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터라 곧 혼인을 시켜 주었다. 결혼후 두 사람은 너무 사랑해 잠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아 둘 다 해야 할 일을제대로 할수가 없었지요.베를 짜지 않아 하늘 나라 사람들은 옷이 부족해지고 견우의 소와 양들은 병에 걸려 앓고 농작물들도 말라 죽어 하늘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땅의 세상도 어지러워졌지요.옥황 상제는 몹시 화가나 "이제부터 직녀는 은하수 서쪽에서 베를 짜고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서 살도록해라!"라고 명령을 내렸읍니다. 견우와 직녀는 용서를 빌었지만 옥황상제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대시 일년에 딱 한번 음력 칠월 칠일 한 번 만날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칠석날이지요.그러나 견우와 직녀가 일 년을 기다려 만나기 위해 나왔을 때에는 은하수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어요.두 사람이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까마귀와 까치들은 너무 불쌍해 곧 서로의 몸을 이어다리를 만들어 두 사람응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 다리를 "까마귀 오(烏),"까치 작(鵲)자를 써서오작교 라고 해요.칠월 칠석날에는 주로 비가 오거나 흐린 경우가 많아요.그것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래요.칠얼 칠석 무렵은 바쁜 농사 일이 어느 정도 끝나고 더위도 한풀 꺽이는 때라 여름 내내 입었던 옷을 빨아 햇볕에 말리등 칠석날 옷과 책을 말리면 일 년 내내 좀을 먹거나 상하는 일이 없다고 해요.이 밖에도 칠석날은 가진 고추등 햇것을 맛보는 날이었어요.그러니까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월 칠석은, 농사일이 한가한 때에 옷과 책 등을 정리하고 새로운 것들을 맛보며 즐기던 즐거운 명절이었던 셈이지요.

추 석

강강수월래는 추석날 밤 처녀들이 떼를 지어 춤을 추면서 노는 놀이지요.강강수월래는 원래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이 왜적에 비해 우리 병사의 숫자가 적자 머리를 써서 산에 불을 붙여 놓고 마을 여자들을 빙빙 돌게 하면 왜적들이 우리 병사 들로 착각하게끔 해서 정말로 왜군을 철수하겠끔 하였다.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이 날의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달밤을 택해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뛰어놀게 된것이예요. 음력 팔월 한가윗날은 날도 좋고 달도 밝아 강강수월래를 하기에는 가장 좋은 날이었을 거예요.추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우리의 큰 명절로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지요.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속담 중에"일 년 열두달 3백 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말도 생겼어요. 음력 8월 15일 추석을 다른 말로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즉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라느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이지요. "가위"라는 말은 신라때 길쌈 놀이인 "가배"에서유래한 것으로 "길쌈"이란 실을 짜는 일을 말하지요. 신라 유리왕때 한가위 한달 전에 베 짜는 여자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베를 짜서 한달뒤인 한가윗날 그동안 베를 ㅈ짠 양을 가지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은 것에서 "가배" 라는 말이 나왔는데 후에 "가위"라는 말로 변했다. 추석날에는 강강수월래,씨름대회,활쏘기 대회, 농악.거북 놀이등 많은 놀이를 했지요.새로나온 과일과 곡식으로 차례상을 차려 드려 한 해에 거둬들인 것을 보고들이고 아침을 먹은 후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하러갔다. 우리의 명절인 추석은 즐겁고 신나는 날인 동시에 그런 즐거움을 얻은 것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은 날이었어요.햇과일 하나만 보아도 조상들에게 감사드릴 줄 알았던 옛 어른들의 겸손한 마음은 우리도 꼭 배워야 할 거예요.

중양절

음력 9월 9일은 중앙절이에요. 중앙절은 다른 말로 "중구일 "이라고도하지요.엣 어른들은 홀수가 두 번 겹치면 복이 들어오는 좋은 날이라고 단오나 칠석날 처럼 중앙절을 명절로 삼았어요. 중앙절에는 높은 곳에 올라가 국화로 빚은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거나 술친구를 찾아가 함께 놀거나 술을 선물하기도 했지요.옛날 중국 어느 마을에 신통한 능력을 가진 장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방은 어느날 환경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돌아오는 9월 9일 이 고을에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니 식구들을 모두데리고 주머니에 수유꽃을 넣었다가 팔에 걸고 산 꼭대기에 올라가라고 이르자 환경은 9월 9일 그렇게하였다.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하루를 보내고 장방의 말대로 해가 떨어진 후에 내려와 보니 가축들이 한 마리도 남김없이 죽어 있었다.그 후부터 중앙절이 되면 산에 올라가는 풍습을 지키게되었고 또한 국화주를 마시게 되었다.중국 궁궐 안에서 가패란이란 궁녀가 9월 9일 국화로 떡을 만들어 먹었대요.중앙절에는 국화주와 국화전 외에 화채도 만들어 먹었어요.가을이면 노랗게 익은 유자를 따다가 송송 썰어 꿀물에 타고 여기에 석류알과 잣을 동동 띄우면 맛있고 시원한 화채가 되지요.중앙절에는 좋은 날 이지만 결혼식이나 잔치를 열지 않았어요. 그건 바로 남이 즐길수 있는 좋은 날에 자기집 잔치로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 었지요.중앙절은 추석처럼 큰 명절은 아니어서 특별한 놀이를 하지는 않고 대신 음식을 가지고 산과 들을 찾아가 하루을 즐겁게 놀았는데 요즘 말하자면 가을 소풍 같은 것 이었어요. 중앙절이 되면 봄에 떠났던 기러기가 우리나라를 찾아오고,봄에 찾아 왔던 제비들은 강남으로 돌아가는 날인 거예요.또 여름 내 극성 이던 모기기가 사라지고,뱀 이나 개구리도 겨울 잠을 자기 위해 사라지고 중앙절 부터는 겨울을 날 수 있는 동물들만 남게 된데요. 즉 중앙절 이후부터는 가을이 가고 계절이 바뀌는 즉 무르익응 가을을 마지막으로 즐기기 위한 명절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동 지

중국 진나라에 공공이라는 사람에게 골칫덩어리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는데, 어느 날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짓날 공공의 말썽장이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어요.그런데 죽은 아들이 그만 역질 귀신이 된 거예요. "역질"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지금은 예방 주사를 맞으면 걸리지 않는 병이지만 그 당시에는 역질이 마을에 돌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 꼼작없이 앓다가 죽어 버리자 공공은 내 아들이었다 해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공공은 아들이 팥을 무서워 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팥죽을 써서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지요.역질 귀신이 된 아들이 공고의 집에 와서 그만 팥죽을 보고 달아나 버리고 말았어요.그 날 이후로 사람들은 역질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었데요.팥은 곡식들 중에서도 유난히 붉은색을 지닌 것이예요.옛날 사람들은 귀신은 밝은 것,즉 붉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색이 있을 때 달아나거나 나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남자 아기를 낳은 집에 붉은 고추를 새끼줄에 꿰어 놓는 것도 그렇고 또 귀신들이 소녀를 좋아 한다고 해서 소녀들은 봉숭아 꽃잎을 찧어 손톱에 빨갛게 물 들이게 했데요.이런 생각은 요즘도 남아 아기들의 백일이나 돌에 수수 팥떡을 하지요?.그런데 동지가 음력 11월 10일 이전에 들며"애동지"라고 해서 팥죽을 쑤어 먹으면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팥죽을 쑤어 먹지 않았데요.동짓날 팥죽을 먹지 않으면 귀신을 막지 못할 뿐만 아니라 쉽게 늙고 잔병이 많이 생겨 일 년 내내 몸이 불편해진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풍습은 오늘날까지도 잘 지켜져 내려오고 있지요. 이제 동짓날이 되면 꼭 엄마가 해 주시는 팥죽을 한 그릇 다 먹도록 하세요. 그리고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음 해에도 건강 하기를 빌어 보면 더 좋겠지요?

섣달 그믐

섣달 그믐날 궁궐에서는 열두마리 동물가면을 쓴 사람들은 붉은 가면을 쓴 사람들이 주문을 외우며 징을 치면 도망을 치며 쫓겨나는 풍습이 있었는데 나쁜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행사였다. 섣달 그믐날은 일 년의 마지막 날이자 새해를 맞기 하루 전날이기도 하지요.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 여러 가지 풍습들이 많이 있었는데 "묵은세배"는 그 동안 무사히 잘 보냈다는 것을 알리는 한 해의 마지막 세배를 드렸다. 인사로 시작해서 인사로 마무리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 민족은 역시 예의를 잘 아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또 섣달 그믐날 대청소를 해서 지난 해 동안 집에 들어와 있던 나쁜 귀신들과 재앙을 버리는 풍습도 있었다."부엌 귀신 맞이"는 부엌 귀신이 음력 12월 25일 이 되면 살고 있던 자리를 떠나 하늘 나라로 가서 자기가 사는 집에서 있었던 일을 하느님께 다 말씀 드린 후에 섣달 그믐날 밤 다시 자기 집으로 제대로 길을 잃지 않고 돌아 오도록 사람들은 집 안 곳곳에 밤새도록 불을 환하게 켜 놓는 풍습이 있었지요. "해지킴"이란 풍습은 잠을 자지 않고 묵은 해가 가는 것을 지키는것으로 이렇게 하면 새해에 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그냥 자면 다음날 아침에 눈썹이 새하얗게 변한다고 해서 잠자는 아이들에게 눈썹에 밀가루를 칠해 아침에 놀라게 해서 한바탕 신나게 웃기도 했데요. 이렇게 섣달 그믐날은 다음 날인 새해 첫날을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는 날이었어요. 집 안팎도 치우고 귀신도 쫓으면서 마음 가짐을 새롭게 했지요. 이제부터 섣날 그믐 날이면 옛날 조상들아 했듯이 집안 청소도 하고 불을 켜 놓고 밤을 새워 보기로 해요. 잠드는 식구 눈썹에 밀가루 칠을 해 보는 것도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또 해지킴을 한 것이니 새해에 복도 더 많이 받겠지요?

 

 

歲時風俗

1. 槪念

歲時風俗이란 일 년을 단위로 해마다 되풀이되는 풍속을 말한다. 농경사회의 풍속은 대부분 일 년을 주기로 하는 農事曆에 따른다. 그러므로 세시풍속에는 농사력이 반영되어 있고, 농업 생산력이 발전해서 농사력이 바뀌면 세시풍속도 바뀐다.

세시풍속은 음력의 달별, 24절기, 명절 따위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이에 따른 의식 및 의례 행사도 포함된다. 따라서 세시풍속은 농민이나 어민과 같은 직접 생산자인 민중들의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삶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시간 관념이 나타나 있는 역법체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는 땅 면적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작지만 북부지방과 남부지방, 산간지대와 평야지대의 기후와 풍토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재배하는 농작물과 농사 주기 또한 다르다. 그에 따라 지역마다 세시풍속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업을 주로 하는 어촌이 생기면서 농촌과는 다른 어촌의 세시풍속도 형성되었다.

세시풍속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록 문헌은 대부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작성한 것이다. 鄭東愈(1744∼1808)의 {晝永篇}(1805), 柳得恭(1749∼?)의 {京都雜記}(정조연간), 金邁淳(1776∼1840)의 {洌陽歲時記}(1819), 洪錫謨의 {東國歲時記}(1849) 등은 대표적인 세시풍속 관련 종합서이다.

2. 歲時名節

(1) 설날

元旦은 한해의 첫날로 歲首 또는 年首라 부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설' 또는 '설날'이라고 부른다.

세수·연수란 말은 한해의 머릿날, 즉 첫째날이란 뜻이고, '설'이란 한자로 愼日이라고 하는데, 謹愼하여 輕擧妄動을 삼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석(除夕, 섣달그믐)을 마지막으로 묵은 해는 지나가고 '설날'을 시점으로 새해가 시작되니, 1년의 운수는 그 첫날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옛사람들은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몸가짐으로 福을 기대해서 연초인 설날에 心身을 근신했다.

농사를 天下之大本으로 여겨온 한민족은 신라 때 이미 '원일상경 시일배일월신(元日相慶 是日拜日月神)'하였으니, 1년 동안의 雨順風調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신에게 제사를 하고, 여러 가지 행사도 가졌다.

정월의 세시행사 중 비교적 지금까지 이어지고 잘 알려져 있는 것에는 우선 설날의 茶禮(차례), 德談, 土亭秘訣 보기, 복조리 사고팔기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간신히 맥을 유지해가는 몇가지 풍속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선 설날 이른 아침에 사람들은 짐승의 소리를 듣고 그해 1년 동안의 운수를 점쳤는데 까치소리는 길한 것, 까마귀 소리는 흉한 것으로 여겨 노인들은 일부러 까치가 울만한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또 설날 이른 새벽 부인네들은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오는데 이를 '용(龍)알뜨기'라고 부른다. 설날 우물안에다 용이 알을 낳는다고하여 가장 먼저 우물물을 떠가는 사람이 용알을 떠가는 것이고, 먼저 떠간 사람은 지푸라기를 우물 안에 던져 표시를 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설날 저녁에는 1년 동안 모아두었던 머리카락을 불태웠는데, 머리털을 그대로 기름종이에 싸서 모았다가 설날에 태우면 길하다는 것이다.

설날 밤이 되면 사람들은 초저녁부터 신발을 감추어 두었는데 설날 밤에 하늘에 있는 夜光鬼가 인간세상에 내려와 집마다 찾아다니는데 제 발에 맞는 신발을 신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으며, 이날 밤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은 1년내내 재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설날에 행해지던 풍속을 다음과 같다.

 설빔(歲粧): 설날 아침 갈아입을 새옷을 말한다.

 차례(茶禮): 설날 아침 일찍 음식(歲饌)과 술(歲酒)을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正朝茶禮라고 한다.

 세배(歲拜): 차례가 끝나고 어른께 드리는 새해 첫인사로, 세배를 마치고 어른에게는 술과 음식을 아이들에게는 과자와 세뱃돈을 마련하였다가 주었다.

 세찬(歲饌): 설날 차례와 손님 접대를 위해 준비한 여러 가지 음식, 대표적인 것으로 흰떡국이 있다.

 세주(歲酒): 설날에 먹는 冷酒를 말하며, 찬 것을 그대로 마신다.

 덕담(德談): 새해를 맞아 서로 복과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말이다.

 성묘(省墓): 조상의 묘에 새해 인사를 告하는 것이다.

 복조리: 1년 동안 이른 새벽에 조리를 사두면 1년 동안 복이 많다는데서 이날 산 조리를 복조리라 함

(2) 대보름(上元)

上元이란 中元(음력 7월 15일. 백중날)과 下元(음력 10월 15일)에 대칭되는 말이다. 음력 1월 15일(정월 보름날)을 대보름이라 하며, 음력 1월 14일을 작은 보름이라 한다.

민속 놀이와 세시 행사들이 가장 많이 행해지는 날이며, 마을 신에 대한 大同儀禮, 大同會議, 大同놀이 등이 이때 모두 이루어진다. 대보름 행사는 14일 저녁부터 시작된다. 집집마다 약밥을 만들어 먹었으며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달맞이나 달집태우기를 했다. 밤에 들판으로 나가서, 새싹이 잘 자라게 하고 논밭의 해충을 없애기 위해 쥐불을 놓았다. 아이들은 연날리기, 바람개비돌리기, 실싸움, 돈치기 따위를 즐겼으며, 어른들은 다리밟기, 편싸움, 횃불싸움, 줄다리기, 동채싸움, 놋다리밟기 따위를 했다. 대보름날 밤에는 항상 온 마을이, 때로는 마을과 마을이 대항하는 경기를 집단적으로 즐겼다. 정월 대보름에는 여러 종류의 세시풍속 행사가 벌어졌다.

 보름밤지키기: 정월 열나흗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해서 잠을 자지 않는다. 자는 아이가 있으면 눈썹에 쌀가루나 밀가루를 발라 놓는다.

 부럼깨기: 밤처럼 딱딱한 껍질을 가진 열매를 딱 소리가 크게 나도록 깨문다. 일 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고 치아가 튼튼해져서 건강한 한 해를 보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귀밝이술(耳明酒): 새벽에 맑은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눈이 잘 보인다고 한다. 어린이에게도 귀밝이술을 마시게 한다.

 다리밟기: 다리를 밟아 건강을 기원한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첫 보름달이 뜨는 밤에 하는 것이 원칙이다.

 소밥주기(農占): 대보름날 아침에 찰밥과 나물을 키에 담아 가지고 외양간에 가서 소에게 준다. 소가 밥과 나물 중 어느 것을 먼저 먹는가에 따라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달맞이: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농악대의 상쇠가 악기를 울리면 달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소망을 빌었다.

 달점: 달의 빛깔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붉으면 가뭄, 허옇게 비추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불놀이: 깡통 속에 솔방울이나 관솔을 넣어 불을 지핀 뒤 깡통을

 빙빙 돌리면 불꽃이 원을 그리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동제(洞祭): 마을 공동체의 신에게 제를 올린다.

(3) 한식날 (寒食日)

寒食은 冬至後 105일째 되는 날로 잡는다. 언제나 淸明 안팎에 든다. 한식때는 조상의 묘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무덤이 헐었으면 떼를 다시 입히니 이것을 改沙草라 하며, 묘 둘레에 식목도 하게 된다. 한식에는 글자 그대로 더운 밥을 안 먹고 찬밥을 먹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중국 晉나라 충신 介子推가 간신배에 몰려 금산에 숨어 있었는데, 晉 文公이 그의 충성을 알고 그곳에서 나오길 명했으나 나오지 않았다. 도리없이 불을 지르고 나오길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안나오고 타죽고 말았다. 그래서 타죽은 충신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 더운 밥을 삼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寒食은 중국에서 전해온 풍속이다. 이즈음에는 새싹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이고 농가에서는 농경준비를 하기 시작하며 식목을 하거나 채소씨를 뿌린다.

(4) 삼짇날

삼짇날은 3의 陽數가 겹치는 날(음력 3월 3일)로서 봄철의 시작을 장식하는 명절이다. 강남 갔던 제비도 옛집에 돌아오고 동면하던 뱀도 땅 속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다. 이날 흰나비를 보면 부모의 상을 당한다고 하고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보면 길하다고 한다. 제비를 보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하며 뱀을 보면 운수가 길하다고 한다. 장을 담그면 장맛이 좋고 호박을 심으면 잘되고 약수를 마시면 연중무병하고 아무리 집안 수리를 해도 무탈하다고 한다. 머리를 감으면 물이 흐르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소담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머리를 감는다. 또한 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해서 둥근 떡을 만들고 기름에 지진 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 국에 띄우고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것을 화면(花麵)이라 한다. 이런 것들은 시절음식으로 제사에도 쓰인다.

(5) 端午

음력 5월 5일을 단오·수리(戍衣) 또는 天中節이라 부른다.

단오는 1년 중에서도 큰 명절로, '端'은 끝과 처음이라는 뜻이 있고 '午'자는 五자와 음이 통하여 단오란 '초닷새'라는 뜻이 된다. 고대 중국의 음양 사상에서 홀수를 양으로 치되, 5월 5일은 양기가 가장 왕성한 천중가절로 쳐왔다. 실제로 이때는 오랜 겨울을 보내고 신록이 우거지는 부활의 계절이며 쑥이나 益母草 등 약초를 뜯어도 약기운이 제일 많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단오를 '수릿날'이라 한다. {東國歲時記}(1849년)는 이 날 쑥을 뜯어서 만들어 먹는 쑥떡이 수레바퀴 모양이기 때문에 수릿날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수리'란 위, 높은 곳, 봉우리, 산 등의 뜻이 있으니 수릿날이란 윗날, 신의 날이란 명절의 뜻을 가진 옛말이라는 주장에 더 수긍이 간다.

이 날 여자들은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뜻에서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였으며, 창포 뿌리로 비녀를 깎아 머리에 꽂기도 하였다.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칼이 소담스럽고 윤기가 난다고 하는데, 이 창포탕에 쑥을 넣어서 삶기도 한다. 또 이 날 익모초와 쑥을 뜯어 두는 풍속이 있다. 여름에 익모초를 달여서 즙을 먹으면 매우 쓰지만 식욕을 얻는다고 해서 민간의 약으로 태고적부터 동서양에서 써왔다. 이 날 또한 민속놀이로서 남자들은 씨름과 활쏘기를 하여 승부를 겨뤘고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하여 단오 명절의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강릉단오제와 법성포단오제 등이 유명하다.

(6) 流頭

음력 6월 15일은 유두일이라고 한다. 유두란 東流頭沐浴이란 말에서 나온 약자이다. 유두일에는 맑은 개울을 찾아가서 목욕하고 머리를 감아 하루를 淸遊한다. 그러면 액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유두의 풍속은 신라 때에도 있었으며 東流에 가서 머리를 감는 것은, 동쪽은 淸이요 양기가 가장 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두일에 문사들은 액막이로 술을 마시고 음식을 장만하여 계곡이나 맑은 냇물을 찾아가서 풍월을 읊으며 하루를 즐겼는데 이를 流頭宴이라고 한다.

유두 무렵에는 참외, 수박 등의 과일이 새로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두 음식으로 水團, 밀전병 등의 각종 떡이 있는데 국수도 아울러서 이들을 먼저 조상신들게 올리니 이것이 流頭薦新이었다. 사당에 유두천신을 하고 나면 식구들이 그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날 먹는 수단이라는 것은 멥쌀가루를 쪄서 만든 떡을 꿀물에 넣고 얼음에 채워서 먹는 것이고, 밀전병은 빈대떡처럼 부친 것이다.

(7) 三伏

夏至後 셋째 庚日을 初伏, 넷째 庚日을 中伏, 입추후 첫 庚日을 末伏이라 하고 이 셋을 통틀어서 三伏이라고 한다. 따라서 복은 10일에 한 번씩 오지만 말복은 입추 관계로 20일만에 오는 경우가 많다.

절기상으로는 가장 힘겨운 농사인 김매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東國歲時記』 三伏 條에 보면 관심은 개장(狗湯)에 집중되어 있다. 개를 삶아 피를 넣고 푹 끓인 것을 개장이라 한다.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 또 개국에 고추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서 시절 음식으로 먹는다. 그렇게하여 땀을 흘리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것을 보충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허해지기 쉬운 때의 가장 손쉬운 우리의 영양보급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또한 햇병아리를 잡아 인삼과 대추와 찹쌀을 넣고 삶아 먹는 삼계탕(蔘鷄湯)도 만들어 먹었으며, 복날에 팥죽을 먹는 것도 있는데 팥죽은 무더운 복중에 악귀를 쫓고 무병하려는 데서 나온 풍속이다. 이때 팥죽에는 찹쌀가루로 빚은 새알심을 넣어 끓였다.

복날에는 벼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속언이 있는데 절기상으로 벼이삭이 패기 직전이어서 생긴 말이다.

(8) 七夕

음력 7월 7일은 七夕이라고 부르며,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오작교(烏鵲橋)를 통해 1년중 단 한차례 만난다는 전설이 있는 날이다.

이날 처녀들은 직녀성에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고 소년들은 학업성취를 빌었으니 칠석날의 견우성과 직녀성은 젊은이로 하여금 소원을 이루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견우성과 직녀성의 두 별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있었다. 두 별은 서로 사랑을 하지만 마주 바라만 볼 뿐 은하수 때문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은하수에 다리만 있으면 자주 상봉하여 사랑을 나눌 수가 있겠으나 다리가 없는 것이 늘 원망스러웠다.

견우와 직녀의 딱한 사정을 알고 해마다 칠석날이 되면 지상에 있는 까치와 까마귀가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에 다리를 놓으니, 이것이 오작교(烏鵲橋)이다.

견우와 직녀는 1년에 한 번 소원을 이룬다. 그러나 사랑의 회포를 다 풀기도 전에 새벽 닭이 울고 동쪽이 밝으면 다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 다시 1년을 떨어져서 보내야 한다.

칠석날 지상에는 까마귀와 까치는 한 마리도 없으며, 어쩌다 있는 것은 병들어 하늘에 가서 오작교를 놓는데 참여 못하는 것들 뿐이었다.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는 기쁨의 눈물이라고 하며, 이튿날 새벽에 비가 오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한다.

이 날이 지나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밀가루 음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각 가정에서는 마지막으로 밀 음식인 밀국수와 밀전병을 만들고 또 햇과일을 차린다. 칠석제 또는 칠성제라고 해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빈다. 처녀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게 해달라고 빈다. 마을에서는 서낭당 등에서 자녀의 무병과 장수를 빌기도 한다. 장마가 지난 때라 그 동안 축축해진 옷과 책을 볕에 쬐는 擧風의 풍속이 있다.

(9) 秋夕

음력 8월 15일은 秋夕, 한가위, 가위, 가배, 중추절이라고 불리워지며, 예로부터 '오월 농부 팔월 신선'이라하여 바쁜 일손을 잠시 쉬는 1년 중 가장 즐거운 명절이었다.

이때는 농사일도 거의 끝나서 햇곡식을 먹을 수 있으며, 과실도 풍성하고 달도 가장 밝아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추석에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송편을 빚고 술도 빚어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성묘와 벌초로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 있다. 객지에 분산되었던 가족들도 고향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맞이한다.

지역마다 특색있는 추석놀이가 있는데, 전라도는 강강수월래, 경기도와 충북은 거북놀이로 유명하다. 여유있는 집에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농사에 꼭 필요한 소(牛)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소의 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전라도에선 '올게심니'라 해서 추석을 전후하여 잘 익은 벼나 수수·조의 목을 모아 기둥이나 방문에 걸어두고 다음 해의 풍년을 빌기도 했다.

이러한 추석의 유래는 신라 제3대 儒理王 9년에 여섯 부락의 여자들을 두패로 나누어 칠월 보름부터 팔월 보름까지 길쌈짜기 시합을 하게 하여 이긴 편은 상을 주고 진 편은 술과 음식을 이긴 편에게 대접하게 하면서 가무와 유희를 즐겼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고 하였으며, 이 때 부른 노래는 回蘇曲이라고 하였다는 『三國史記』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길쌈의 공동작업은 영남지방에 그 풍속이 남아 있다.

추석은 민족 대명절이 되어 객지의 자손들이 고향을 찾아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해 조상의 은혜를 잊지 않는 아름다운 풍속으로 정착했다.

추석은 명칭은 처음에는 가배·가위라 칭해지다가 한문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중추·추중·칠석·월석 등을 사용하였으며 뒤에 정리되고 합해져 秋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벌초: 대개 추석전에 조상의 묘를 찾아가서 풀을 베는 풍속이다.

 송편: 햅쌀로 빚은 달떡으로 속에는 콩, 팥, 밤, 대추 등 그해 수확한 것을 쓴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예쁜 배우자를 만나게 되고, 밉게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하여 총각·처녀들은 솜씨를 뽐낸다.

 강강수월래: 남도지방 풍속으로 추석날 밤에 하는 부녀자들의 놀이다.

(10) 重陽節

음력 9월 9일은 重九 또는 重陽이라고 부른다. 즉 陽數가 겹쳤다는 뜻으로 3월 3일의 삼짇날, 5월 5일의 단오 같은 음양철학적인 重日名節의 하나이다.

이날 각 가정에서는 화채와 국화전, 국화주를 만들어 먹었다. 사람들은 산이나 계곡을 찾아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하여 하루를 단풍놀이로 즐겼는데, 요즈음 학교 가을소풍의 유래라고 볼 수 있다.

(11) 除夕

1년의 마지막 날인 음력 12월 30일을 섣달 그믐 또는 除夕, 除夜라 부른다. 이날 저녁에는 1년도 다 지나간다는 인사로 사당과 어른을 찾아가 묵은 세배(舊歲拜)를 하였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성묘도 하였다. 밤에는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하여 잠을 자지 않았는데 이를 해지킴(守歲)라고 하였다.

집 안팎을 깨끗이 대청소하여 묵은 해의 잡귀와 액을 물리치고 신성하게 새해를 맞이하였다. 또한 1년 중에 있었던 거래의 종결을 맺으니 외상값을 거둬 들이기도 하였다.

3. 節氣

절기는 태양의 황경(黃經)에 맞추어 1년을 15일 간격으로 24등분해서 계절을 구분한 것이다. 1년을 12節氣와 12中氣로 나누고 이를 24절기라고 하는데, 절기는 한 달 중 月初에 해당하며 중기는 月中에 해당한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음력

황경

양력

참 고

입춘(立春)

1월 절

315

2월 4일경

봄의 시작, 입춘대길

우수(雨水)

1월 중

330

2월 19일경

봄비가 내리고 얼음이 녹는다

경칩(驚蟄)

2월 절

345

3월 6일경

개구리 동면 끝

춘분(春分)

2월 중

0

3월 21일경

밤낮의 길이가 같다

청명(淸明)

3월 절

15

4월 5일경

논농사 준비

곡우(穀雨)

3월 중

30

4월 20일경

못자리 마련

입하(立夏)

4월 절

45

5월 6일경

여름시작, 냉이 죽고 보리 익는 때

소만(小滿)

4월 중

60

5월 21일경

모내기 시작

망종(芒種)

5월 절

75

6월 6일경

보리 수확, 모심기

하지(夏至)

5월 중

90

6월 21일경

낮길이 최고, 매미가 울기 시작

소서(小暑)

6월 절

105

7월 7일경

장마철 시작

대서(大暑)

6월 중

120

7월 23일경

여름 최고 더위

입추(立秋)

7월 절

135

8월 8일경

단풍잎

처서(處暑)

7월 중

150

8월 23일경

더위 물러남. 아침저녁 일교차 커짐

백로(白露)

8월 절

165

9월 8일경

하얀 이슬

추분(秋分)

8월 중

180

9월 23일경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다.

한로(寒露)

9월 절

195

10월 8일경

찬이슬, 국화전

상강(霜降)

9월 중

210

10월 23일경

서리, 추수 마무리

입동(立冬)

10월 절

225

11월 7일경

겨울 시작, 물과 땅이 얼기 시작

소설(小雪)

10월 중

240

11월 22일경

첫 눈

대설(大雪)

11월 절

255

12월 7일경

큰 눈

동지(冬至)

11월 중

270

12월 22일경

가장 긴 밤, 팥죽.

소한(小寒)

12월 절

285

1월 6일경

본격 추위

대한(大寒)

12월 중

300

1월 21일경

최고 추위


                  절기에 따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立春

24절기 가운데 첫번째 절기. 태양의 황경이 315°인 때로서 양력 2월 4일 무렵이다. 음력으로는 정월에 들기도 하고, 섣달, 혹은 정월과 섣달에 거듭 들기도 한다(再逢春). 입춘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로 봄이 시작되는 때이다. 여러 가지 민속행사가 행해지는데, 대표적인 것은 좋은 뜻의 글귀를 써 대문·기둥·대들보 등에 붙이는 일이다. 이것을 立春帖이라 하며, 立春祝 또는 春祝이라고도 한다.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손수 쓰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해서 써 붙인다. 다만 喪家에서는 하지 않는다. 널리 쓰이는 입춘축문으로는 立春大吉, 國泰民安, 開門萬福來, 子孫萬世榮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궁중에서는 설날에 내전 기둥과 난간에다 문신들이 지은 延祥詩 가운데 좋은 것을 뽑아 써 붙였는데, 이를 春帖子라고 불렀다. 제주도에서는 입춘굿을 한다. 또한 농사의 풍흉을 알아보기 위하여 보리뿌리를 뽑아 점을 쳐 보기도 한다.

(2) 雨水

24절기의 하나. 음력 정월 중에 있는 절기로 입춘과 경칩 사이에 있다. 우수는 눈이 비로 내리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는 뜻이므로, 봄기운이 돋고 초목이 싹트는 때를 말한다. 천문학적으로는 태양의 黃經이 330°가 될 때로, 양력 2월 19일 경이다. 옛날 중국사람들은 雨水入氣日 이후 15일 동안을 5일씩 나누어 三候로 하였는데, 마지막 5일인 末候에는 봄빛이 완연해진다.

(3) 驚蟄

太陰太陽曆에서 사용하는 24節氣의 하나. 음력 2월로서 겨울잠을 자고 있던 벌레가 날씨가 따뜻해져서 밖으로 나오는 시기라는 뜻이다. 태양의 視黃經이 345°에 이르는 때로, 양력 3월 6일경에 해당한다. 옛사람들은 이 무렵에 첫번째 천둥이 치고, 그 소리를 들은 벌레들이 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餘寒未盡의 계절에 해당되며, 해〔年〕에 따라서는 남쪽지방에서도 가끔씩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봄이 가깝기 때문에 낮시간은 서서히 길어지는 시기이다.

(4) 春分

24절기의 하나. 태양의 黃經이 0禑일 때를 말하며 태양은 적도를 통과하여 남반구에서 북반구로 들어간다. 태양은 적도 위를 똑바로 비추고, 지구상에서는 밤낮의 길이가 거의 같아진다. 음력에서는 춘분은 2월 중이면 어느 날에나 해당되며 양력은 3월 21일(윤년은 3월 20일)로 거의 일정하다. 1992년 이후에는 윤년 다음해도 20일이 되며 2088년에 이르러서는 19일이 되지만 2100년이 지나면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중국 역법에는 동지가 가장 중시되어 달력계산의 기준점이었으나 서양에서는 춘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유럽의 봄은 춘분부터인데 한국에서는 입춘부터 봄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농가에서는 춘분부터 파종 준비 등 농사 준비를 서두른다.

(5) 淸明

24절기의 하나. 태양의 黃經이 15禑에 있을 때를 말하며, 春分과 穀雨 사이의 절기이다. 양력 4월 5∼6일 무렵이고 음력으로는 3월절이다. 농가에서는 이 날을 기하여 논농사의 준비작업인 논둑의 가래질을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청명 15일 동안을 5일씩 3분하여 처음 5일에는 오동나무가 꽃피기 시작하고 다음에는 들쥐 대신 종달새가 나타나며 마지막 5일에는 무지개가 처음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한국은 청명을 전후한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하여 공휴일로 삼고 있는데 대개 寒食과 겹쳐진다.

(6) 穀雨

24절기의 하나. 淸明과 立夏 사이에 들어 있으며 태양의 黃經이 30°에 해당할 때이다. 양력 4월 20일경이 되며, 그 때부터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된다. 곡우 때가 되면 봄비가 자주 내리고 百穀이 윤택해진다 하여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는 말이 있다. 옛날 곡우 무렵이면 농가에서는 못자리를 하기 위해 볍씨를 담갔는데,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잘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俗信이 있다. 곡우 때는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르는 시기여서 전라남도나 경상남북도·강원도 등지에서는 깊은 산이나 명산으로 곡우물을 먹으러 간다. 곡우물은 주로 산다래나 자작나무 또는 거자수·박달나무 등에 상처를 내었을 때 거기서 나오는 물을 말하는데, 그 물을 마시면 몸에 좋다고 하여 약수로도 쓰인다. 또 곡우 때가 되면 黑山島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북상하여 충청남도의 格列飛列島 부근으로 올라온다. 그 때 잡는 조기를 특히 <곡우사리>라 부르는데, 살은 아주 적지만 맛이 있다.

(7) 立夏

24절기 중 7번째 절기. 음력 4월의 절기로 穀雨와 小滿 사이에 들며, 양력 5월 5∼6일경에 해당된다. 이때부터 여름으로 접어든다는 뜻에서 입하라 하며 입하 이후 입추 전까지를 여름이라 한다. 이때가 되면 농사가 바빠지며, 해충·잡초 제거작업 등의 일이 많아진다. 서울 송파지역에서는 세시행사의 하나로서 쑥버무리를 절식으로 마련하기도 한다.

(8) 小滿

24절기의 하나.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들며 음력 4월, 양력으로 5월 21일 무렵이 된다.

태양이 黃經 60禑에 오는 시기로, 이때부터 여름의 기분이 나기 시작하며 식물이 성장한다. 소만 무렵에는 모내기를 시작한다. 모판을 만들어서 모내기까지 모의 성장기간이 옛날에는 45∼50일 걸렸으나, 지금은 비닐모판에서 40일 이내에 충분히 자라기 때문에 소만에는 모내기로 인해 1년 중 제일 바쁜 계절이 된다. 옛날 중국에서는 小滿入氣日로부터 망종까지의 시기를 5일씩 三候로 등분하여 初候에는 씀바귀가 뻗어오로고, 中候에는 냉이가 누렇게 죽어가며, 末候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하였다.

(9) 芒種

24절기의 하나. 소만과 하지 사이에 들며, 음력 4∼5월, 양력 6월 6∼7일이 된다. 망종이란 벼·보리 등 수염이 있는 곡식의 씨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라는 뜻이다. 이 시기는 옛날에는 모내기와 보리베기에 알맞은 때였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속담이 있듯이 망종까지는 모두 베어야 논에 벼도 심고 밭갈이도 하게 된다. 특히 모내기와 보리베기가 겹치는 이 무렵의 바쁜 농촌의 상황은 보리농사가 많았던 남쪽일수록 더 심해서 이 때가 1년 중 제일 바쁜 때였다. 음력 4월내에 망종이 들면 보리농사가 잘되어 빨리 거두어 들일 수 있으나 5월에 망종이 들면 그 해 보리농사가 늦게 되어 망종내에도 보리수확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10) 夏至

24절기 중의 하나. 태양이 黃道에서 가장 북쪽인 黃經 90禑, 춘분점과 추분점 중간에 있을 때이다. 지구 북위 23禑 30′북회귀선에서는 태양이 바로 위에 보이며, 한국과 같은 북반구는 태양 남중고도가 가장 높고 해그림자는 가장 짧다. 芒種과 小暑 사이, 현행 태양력으로 6월 21일 무렵이 된다. 북반구는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으며 북극권에는 하루 종일 태양이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지 않는 白夜現狀을 보이는 반면 남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며 태양이 지평선 밑에서 위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특이한 현상을 보인다.

(11) 小暑

24節氣의 11번째. 夏至와 大暑 사이에 들며 음력으론 6월, 양력으론 7월 7·8일쯤이다. 한국에서는 이 시기에 장마전선이 오래 자리잡아 습도가 높은 장마철을 이룬다. 예전에는 논매기를 하였으나 지금은 제초제를 뿌리고, 하지 무렵에 심은 팥·콩·조 등을 김맨다. 또 이때 堆肥를 장만하고 논두렁의 잡초를 깎기도 한다. 소서로부터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며 과일·채소류가 풍성해지고 밀과 보리가 새로 나온다.

(12) 大暑

24절기의 하나. 小暑와 立秋 사이에 들며, 음력 6월, 양력 7월 23일께이다. 태양의 黃經이 120°가 되는 때이고, 대개 中伏 무렵이며 더위가 심한 시기이다. 옛날에는 논김을 매어주었으나 지금은 제초제를 뿌리고 매지 않는다. 그러나 밭김은 매어주고 퇴비장만 등이 이 무렵에 계속된다. 옛날 중국에서는 大暑入氣日로부터 입추까지를 5일씩 끊어서 三候라 했는데, 初候에는 썩은 풀이 변해 반딧불이 되고, 中候에는 흙이 습하고 무더워지며, 末候에는 큰비가 때때로 내린다고 했다. 이 무렵은 몹시 덥고, 소서 때부터 장마전선이 한반도 동서에 걸쳐 자주 큰 장마가 진다.

(13) 立秋

24절기 중 13번째 절기. 음력 7월의 절기로서 大暑와 處暑 사이에 들며, 양력 8월 6∼9일 무렵에 해당된다. 이때부터 가을로 접어든다는 뜻에서 입추라 하며, 입추 이후 입동 전까지를 가을로 여긴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가을 채비를 시작하는데, 특히 김장용 무·배추를 심는다. 김매기도 끝나가고 농촌도 한가해지기 시작하여 혼히 이때를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 일컫는다.

(14) 處暑

24절기의 하나. 음력으로는 7월의 中氣이고, 양력으로는 8월 23일 무렵으로, 입추와 白露 사이의 暑退期이다. 이때 태양은 黃經 150禑에서 15禑 사이인 처서의 구역을 지난다. 옛날 중국에서는 처서 15일간을 5일씩 三候로 세분하여 ①매가 새를 잡아 늘어놓고 ②천지가 쓸쓸해지기 시작하며 ③논벼가 익는다고 하였다. 한국에서는 처서에 비가 오면 흉작이 든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처서가 지나면 벌초를 하고, 여름철 장마로 습기가 찬 옷이나 책을 말리는 포쇄를 하며 아침·저녁으로 선선함을 느끼게 되고 파리·모기도 사라지게 된다. 또한 백중의 호미씻이(洗鋤宴)도 끝나게 되어 농촌이 한가해지는 때이기도 하다.

(15) 白露

24절기의 하나. 處暑와 秋分 사이에 들며, 음력 8월, 양력 9월 9일 무렵으로 태양의 황경이 165阮에 올 때이다. 이때쯤이면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기운이 완연하다. 또한 한국에서는 장마도 걷히고 中候와 末候에는 쾌청한 날씨가 계속된다. 간혹 남쪽에서 불어오는 태풍이 곡식을 넘어뜨리고 해일의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백로가 음력 7월 중에 드는 수도 있는데 제주도와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그러한 해에 오이가 잘 된다고 한다. 경상남도 섬지방에서는 '백로에 비가 오면 十里 千石을 늘인다'고 해서 백로에 비가 오는 것을 풍년의 징조로 생각하였다.

(16) 秋分

24절기의 하나. 태양의 黃經이 180°일 때이며, 태양은 적도를 통과하여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들어간다. 16번째 절기로 白露와 寒露 사이에 있다. 음력으로 8월, 양력으로 9월 23일 무렵이다. 이날 태양이 秋分點에 이르러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고, 추분이 지나면 점차 밤의 길이가 길어진다. 시기적으로는 수확기가 되며 이때부터 여러 산채를 말려 나물을 준비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추분기간을 3부분으로 나누어 처음 5일간은 우뢰소리가 그치고, 다음 5일간은 동면할 벌레가 구멍을 막으며, 나머지 5일간은 땅 위의 물이 마르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17) 寒露

24절기 가운데 17번째 절기. 추분과 상강 사이에 들며 음력으로 9월, 양력으로 10월 8일 무렵이다. 태양이 황경 195°의 위치에 올 때이며 이 시기에는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이슬이 찬 공기를 만나서 서리가 맺힌다. 또한 단풍이 짙어지고, 여름새와 겨울새의 교체가 이루어지며, 농촌은 추수가 한창인 시기이다. 특별한 민속행사는 없으나 국화전을 지지고 국화술을 담그며 여러 모임이나 놀이가 성행한다. 중국에서는 한로 15일간을 5일씩 三候로 나누기도 하였다.

(18) 霜降

24절기의 하나. 한로와 입동 사이에 들며 음력 9월, 양력 10월 23·24일경이 된다. 태양의 황경이 210禑 되는 때이다. 이때는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며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지므로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의 계절이다. 옛날 중국사람들은 상강으로부터 입동 사이의 기간을 5일씩 三候로 세분하여, 初候에는 승냥이가 산짐승을 잡고, 中候에는 초목이 누렇게 떨어지며, 末候에는 겨울잠을 자는 벌레가 모두 땅에 숨는다고 하였다. 말후에 가서 벌레가 이미 겨울잠에 들어간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계절적으로 추울 때이다. 이는 農耕始畢期와도 관련되어, 9월 들어 시작된 추수는 상강 무렵에 마무리가 된다.

(19) 立冬

24절기 중 19번째 절기. 음력 10월의 절기로서 霜降과 小雪사이에 들며, 양력 11월 7∼8일 무렵에 해당된다. 이때부터 겨울로 접어든다는 뜻에서 입동이라 하며, 입동 이후 3개월을 겨울로 여긴다. 일반적으로 입동을 전후하여 김장을 하며,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입동 때의 날씨로 그해 겨울 날씨를 점친다. 경상남도 도서지방에서는 입동에 갈가마귀가 날아온다고 하며, 密陽에서는 갈가마귀의 배에 흰색 부분이 보이면 이듬해 목화가 잘 된다고 믿었다. 제주도에서도 날씨점을 볼 때, 입동 날씨가 따뜻하지 않으면 그해 바람이 심하게 분다고 생각했다.

(20) 小雪

24절기의 하나. 입동과 대설 사이에 들며, 음력 10월, 양력 11월 22일이나 23일 무렵이다. 태양의 황경이 240°에 오는 때이다. 이때부터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여 점차 겨울기분이 든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한 햇볕이 있어 小春이라고도 불린다. 중국사람들은 소설로부터 대설까지의 기간을 5일씩 三候로 구분하여, 初候에는 무지개가 걷혀서 나타나지 않고, 中候에는 天氣가 올라가고 地氣가 내리며, 末候에는 폐색되어 겨울이 된다고 하였다. 소설 무렵, 대개 음력 10월 20일께는 관례적으로 심한 바람이 불고 날씨가 차갑다. 이 바람을 손돌(孫乭)바람이라 하여 외출을 삼가고 뱃길을 조심한다.

(21) 大雪

24절기의 하나. 小雪과 冬至 사이에 들며 음력 11월, 양력 12월 7∼8일경으로 태양의 황경이 225°에 도달한 때이다. 이 시기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대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원래 재래역법의 발생지이며 기준지점인 중국의 화북지방의 상황을 반영하여 붙여진 것이므로 이 시기에 반드시 적설량이 많다고는 볼 수 없다. 중국에서는 대설로부터 동지까지의 기간을 다시 5일씩 三候로 나누어서, 初候에는 산박쥐가 울지 않고, 中候에는 범이 교미하여 새끼치며, 末候에는 여지가 돋아난다고 하였다. 한편, 이 날 눈이 많이 오면 다음해 풍년이 들고 푸근히 겨울을 난다고 한다.

(22) 冬至

24절후의 하나. 일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고대인들은 이날 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여기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동짓날을 '亞歲'라 하였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동짓날 에는 동지팥죽 또는 冬至豆粥, 冬至時食이라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팥을 고아 죽을 만들고 여기에 찹쌀로 團子를 만들어 넣어 끓인다. 동짓날의 팥죽은 時節食의 하나이면서 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즉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薦新의 뜻이 있다. 동짓날에도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유래는, 중국의 {荊楚歲時記}에 의하면 共工氏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疫神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역신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는 것이다. 동짓날에 궁안에 있는 內醫院에서는 소의 다리를 고아, 여기에 白薑·丁香·桂心·淸蜜 등을 넣어서 약을 만들어 올렸다. 이 악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호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觀象監에서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나라에서는 <同文之寶>라는 御璽(옥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다. 各司의 관리들은 서로 달력을 선물하였으며, 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파란 표지의 달력을 선사하였다. 동짓날은 부흥을 뜻하는데 이날부터 태양이 점점 오래 머물게 되어 날이 길어지므로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 달력을 만들어 가졌던 것이다. 동짓날부적으로 '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면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또 동짓날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23) 小寒

24절기의 하나. 동지와 대한 사이에 있으며 음력 12월, 양력 1월 5일 무렵이다. 태양이 황경 285°의 위치에 있을 때이다. 절후의 이름으로 보아 대한 때가 가장 추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 한국에서는 소한 때가 가장 춥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 또는 '소한 추위는 꾸어 다가라도 한다'는 속담은 소한이 절기 중 가장 춥다는 데서 연유한다.

(24) 大寒

24절기의 마지막 節候. 양력 1월 20일 무렵이며, 태양의 황경이 300禑되는 날이다. 대한은 음력 섣달로 매듭을 짓는 절후이다. 원래 겨울철 추위는 立冬에서 시작하여 小寒으로 갈수록 추워지며 대한에 이르러서 최고에 이른다고 하지만, 이는 중국의 경험에 입각한 것이고 한국에서는 1년 중 가장 추운 시기가 1월 15일께이므로 다소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대한이 소한의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 '소한의 얼음 대한에 녹는다'라는 속담도 있다. 즉 소한 무렵이 대한 때보다 훨씬 춥다는 뜻이다. 제주도에서는 이사나 집수리 따위의 집안 손질은 언제나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의 1주일간에 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다.

 

한반도의 풍속사

숨바꼭질, 그림자밟기,"고시내"하는 풍속, 부적부치기,구슬치기, 돌치기, 딱지따먹기, 땅따먹기, 투석전 놀이(돌싸움), 돌을 지고 뒤로 넘기기, 쌀가마 들기, 쌀가마 들고 어깨너머로 넘기기, 서서 빙글빙글 돌기,화전놀이,농악(農樂)놀이, 윷놀이, 제기차기,자치기,연鳶날리기,다리밟기踏橋 놀이,그네뛰기,강강술래(수월래),널뛰기,놋다리밟기,탑돌이,지신밟기,줄다리기,줄타기, 가배嘉俳놀이  한가위 놀이  길쌈(질쌈)놀이,모심기 노래(남도 들노래),상주지역의 모심기 노래인 채연가.서낭대싸움,달집에 불이야 놀이(쥐불놀이),백중百中놀이,횃불싸움놀이 (炬火戰 거화전),고싸움,차전車戰놀이,양주소놀이굿,쇠머리 대기(나무쇠 싸움),뗑갈,씨름,오광대(五廣大)  / 덧배기춤,하회별신굿탈놀이 (하회가면 탈놀이) 봉산탈춤

"고시내"하는 풍속

우리가 강가나 야외에서 밥을 먹거나 음식을 먹을 때 부정을 탄다고 먼저 산천 초목, 구신(귀신)들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풍습이다. 하찮은 미물인 개미나 여러 가지 동물들에게 먹이를 나눠먹는 원시시대부터 내려오는 무의식적인 풍습의 발로인 듯하다.

부적부치기

해마다 새로운 해가 열리면 집안에 좋은 일만 있어 달라고, 또는 점을 쳐 보고서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미리 대비하거나 아들을 낳아 달라고(농경생활에 있어서는 노동력이 중요하니까) 빌거나 하는 풍습이다. 주로 벽에 부치거나, 이부자리, 베개, 몸에 옷에 달고서 다닌다.

화전놀이 / 봄꽃나들이

부녀자와 아이들, 혹은 동네 남녀들이 창꽃(진달래 )피는 철에 야산이나 강가에서 잘 익은 창꽃을 따다가 깨끗이 씻은 후에 준비해온 화로쟁반위에 기름을 붓고서 밀가루 나 쌀가루 반죽을 놓고서 창꽃을 놓는다. 찌짐, 부침개이다. 화창한 봄을 감상하면서 맑은 공기와 산천초목의 긴 겨울잠을 깨우고서 기지개를 펴는 것을 즐기는 놀이이다.  이 때는 버들 강아지도 많이 핀 상태이다.

농악(農樂)놀이  

단조롭고 힘든 육체노동에 장구와 징,꽹과리(괭과리) 등을 사용하여 일하는 이들의 흥에 취하여 보다 즐겁고 운율에 맞추어 일하는데 규칙성을 주기 위한 놀이이다.예를 들면 모내기 때 모두가 일치하여 모를 동시에 심고 뒤로 물러나는 데 일종의 통일성을 주기 위한 놀이이다.   농악은 굿, 풍장, 매구 등으로 불리어진다. 신석기시대이래로 농경생활로 인하여 농작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일종의 농경제의 農耕祭儀로서, 부락,마을 단위의 싸움, 군사적인 측면,전쟁에 사용되어졌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 오월 단오(파종기), 유월 김애기, 팔월 보름날(추석,한가위), 시월 상달 추수기에 열리는 놀이에는 북,장구, 소고(작은 북), 징, 꽹과리등 여러 가지 악기를 사용하며, 복장은 무명, 광목으로 만든 저고리, 바지에 짚신을 신고 머리에 긴끈을 동여맨 형태로 끈을 돌리며 온갖 재주를 부린다. 다양한 색상의 옷, 악기, 색띠 등으로 치장하여 농악대를 만들어 마을마다, 집집마다 돌면서 마당밟기와 조금씩의 추렴(돈을 거두거나, 농산물,곡식등을)을 하여 가난한 사람들이나 동리에서 필요로 하는 일에 쓰기 위하여 다닌다.  농사일에 사용할 때는 일손의 흥을 돋구어 주고, 명절날에는 마을의 안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윷놀이

삼국시대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놀이로서 아마도 선사시대의 부족이나 씨족의 명칭인 듯하다. 도,개,걸,윷,모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이는 돼지, 개,양,소,말 등 모두 가축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해마다 정초(일월)에 농사의 풍흉을 점占치는 복술卜術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가족,친척,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마당,안방, 시장의 빈터에서 남녀노소가 어울려 즐기는 놀이거리가 되어있다.

제기차기

남정네들이나, 종내기들 즉 남자아이들이 주로 가지고 놀이를 하는데, 동전이나, 엽전을 가지고서 종이나, 비닐을 감싸거나, 구멍에 수셔넣어 동여맨 다음,칼로, 가위로 종이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서 깃털형태로 만든 다음 놀이를 한다. 양다리를 교대로 차거나, 오른발로, 왼발로만 제기를 차서 많은 횟수를 차면 이긴다.

자치기

나무막대기를 하나는 짧게 하나는 길게 하여 짧은 것은 양쪽을 어긋나게 비스듬하게 낫으로 깎은 다음 긴 나무를 소에 부여 잡고서 짧은 것을 가장자리를 쳐서 튕겨 오르게 한 다음 공중에서 쳐서 멀리 보내는 놀이다. 어릴 때 빈 공터에서 논에서 많이 하던 놀이이다.

연(鳶)날리기

태극무늬,귀신,솔개,매,나비,방패,용,뱀, 등의 여러 가지 문양이나, 모양의 형태를 만든다. 삼한 사온이 뚜렷한 한반도에서 겨울철 시베리아 기단에 놓이게 되면 바람이 몹시 거세다. 이럴 때, 강둑이나, 논에서 긴 실로 매어 단 연을 날리려 가장 멀리 날리게 한 연이나, 서로 상대방의 연줄을 끊어 먹는 놀이이다. 이는 한 해의 나쁜 액운을 정월에 연에 실어 멀리 날려 보내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다리밟기 (踏橋놀이)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는 풍속인데, 다리橋는 사람의 다리脚를 연상시키는데 다리를 밟으면 일년동안 다리병이 없이 잘 지낸다는 생각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이 동안에 남녀들이 서로 눈을 맞춰 희롱하는 습속이 있다.

그네뛰기

남녀가 즐기는 놀이로서 춘향전에도 춘향이가 그네를 뛰는 장면이 나온다. 한사람이 그네뛰기를 하기도 하나 상대방이 서로 마주보고서 서로 반대편으로 번갈아 가며 힘을 주어 그네를 뛴다. 주로 다리의 힘과 손에 그네를 부여잡는 힘으로 추진력을 얻어 하늘을 많이 올라가는 사람이 이긴다. 이씨조선때는 답답하게 집안에 갇혀 지내던 아녀자들이 바깥 나들이나, 혹은 집안에서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강강술래(수월래)

전라도 해안지대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놀이로서, 팔월 추석 즈음에 밝은 달밤에 부녀자들이 서로 손을 부여잡고큰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형태의 놀이이다. 햇곡식으로 지은 술, 음식을 조상님에게 제례祭禮를 올린 후,원무를 춘다. 문턱넘기놀이, 멍석말이놀이, 남생이놀이,쥐잡기놀이 등을 한다. 그 기원은 아득한 상고시대의 집단가무에서 비롯된 것이나 이씨조선 때의 임진왜란任辰倭亂 당시 병정들의 숫자가 많게 보이고 "아직도 여유가 있다"라는 의미를 왜적에게 보이기 위한 전술적인 면이 있다.

널뛰기

음력 정월에 길다랗고 넓은 널판지를 새끼로 동여맨 더미나, 흙으로 북을 준 약간 높은 곳에 올려놓고서 서로 상대방은 각각 가장자리에서 발판을 굴러서 상대방을 쳐 올려주는 놀이이다. 올라가면서 다양한 다리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이도 또한 이씨조선때는 답답하게 집안에 갇혀 지내던 아녀자들이 바깥 나들이나, 혹은 집안에서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놋다리밟기   시내를 건너기 위해 사람이 놓은 다리

음력 대보름날 밤에 몸치장을 잘 한 아녀자들이 모여 노는데, 모두 한줄로 늘여서서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껴안은 채 엎드린다. 어린소녀를 가려서 엎드린 사람의 등을 밟고 지나가게 하는 놀이이다. 이때 양쪽에서 그 소녀의 손을 부여잡고 부축한다. 노래를 부른다.  고려때 공민왕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온 홍건적에게 쫓기어 복주(안동)으로 도망을 올 때, 당시 함께 도망 온 노국공주라는 왕비를 시내를 보다 수월하게 건너도록 한데서 유래한다. 여러 가지 궁중 의복, 집기,음식 등을 가리키는 말이 노래속에서 나온다.

탑돌이

고대국가들인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생겨난 놀이이다. 불교신자들이 사찰에서 중들과 함께 불탑을 오른 쪽(시계반대방향)으로 빙빙 돌면서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고 자신의 기원을 비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면, 집안의 안정과 남편의 극락왕생,  혼인, 기타등등.  신라 원성왕(元聖王:785~799)때의 일을 기록한 삼국사기에서 찾아 볼수 있는바, 당시는 사월 초파일(음력 4월 8일)부터 15일까지 많은 사람들이 경주 흥륜사(興輪寺)에서 탑돌이를 한 바 있다. 그리고 간혹, 남녀간의 희롱하는 바가 되었다.

지신밟기

마당밟기,매김(埋鬼)굿이라는데  음력 정월 초사흘날부터 보름까지 하는 놀이다. 지신地神은 집안에 우환을 가져 온다는 잡귀,잡신을 이르는 말인데, 발로 땅을 밟아서 한해 동안 무사태평하기를 비는 것이다. 지신밟기라는 큰 대나무깃대에 깃발을 새겨 건 다음에, 농악대들이 다양한 분장을 한 형태로 집집마다 찾아다닌다. 이들 중에는 사냥한 꿩과 토기를 망태기에 질끈 동여매고서 활이나, 엽총을 가진 포수가 항시 따라 다닌다. 이는 "지신을 잡을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당에서 마당놀이를 하는데 징과 괭과리를 쳐 집안에 쇠소리를 낸다. 원래 잡귀들은 쇠소리를 싫어한다는 믿음에서 비롯한다. 이는  선사시대에 무당들이 팔령八鈴을 가지고 매장된 유물에서도 알 수 있다. 큰 마루 앞에서는 대청지신大廳地神풀이를, 큰 방 앞에서는 큰 방 성조成造풀이를 한다.제각각 방마다 각방치장풀이를 , 부엌앞에서는 부엌(조왕)지신 풀이를, 곳간앞에서는 곳간지신풀이를 한다. 이때 주인은 술과 음식을 내어서 농악대에게 나누어주고 혹은 돈이나, 곡식을 내어주기도 한다.

줄다리기

주로 오네에서 혹은 동리마다 줄을 당겨 끌어 오는 쪽이 이긴다. 이는 "어느 마을이 이기면 풍년이고 어느 마을이 이기면 흉년이다"라는 믿음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즐거운 행사였기에 온 마을 사람들이 참가하여 마을의 협동을 과시하는 놀이거리였다. 가을 추수가 끝난 후, 그 해에 수확한 볏짚을 가지고 새끼줄을 꼬아서 모은 다음 보다 더 큰 새끼줄로 만들어 길게 연결을 한다. 해가 뜨는 쪽의 마을은 숫줄을, 해가 지는 쪽의 마을은 암줄이라 한다. 이는 음양의 이치를 따른 것이라 본다.  혹은 이긴 마을에서는 한해가 풍년이고 좋다는 믿음이 있기도 하다. 이는 그 해의 새끼줄을 보고서 얼마나 강한지를 즉 벼의 생육을 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줄타기

양쪽에 줄을 매어놓은 끈 위에서 여러 가지 잔재주를 부리는 놀이다. 여러 가지 재담才談을 섞어서 구경꾼들을 웃기게 한다.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악사들("잽"이라고 부른다)이 장구,피리, 해금등을 사용하여 흥을 돋군다. 이씨조선의 기록에는 외국사신들을 즐기게 하기 위하여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기예伎藝로서 재인才人이라고 불렀다.남사당이라는 광대패에 속해 있었으나, 그 기원은 선사시대에 집단가무할 때, 서로의 자랑을 하는 기술로서, 삼국시대로 오면, 군사훈련으로서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화랑이라는 것도 사실은 미남미녀들을 사용하여 보다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기술을 과시하며, 보다 많은 우수한 잔재를 가진 사람을 인재로 삼아서 전쟁터에 보내는 것이엇으니, 이 줄타기도 보면, 사람을 모으는 놀이이다. 줄타기는 줄 위에서 부채를 한손으로 든 채 균형을 유지하면서, 한발을 떼거나, 두발을 동시에 떼는 등, 춤을 추기도 하고 앞뒤로 번갈아 가기도 하며, 줄을 차고 올라 공중재비를 돌기도 한다.

가배(嘉俳)놀이 / 한가위 놀이 / 길쌈(질쌈)놀이

음력 7월 16일부터 추석전날까지(음력14일) 부녀자들이 두 패로 나뉘어 길쌈을 했던 풍습에서 유래한 놀이이다. 신라 유리왕(儒理旺)때에는 나라의 부녀자들을 모아서 공주 두 명을 중심으로 편을 가르고서 길쌈을 시켰다고 한다. 길쌈을 많이 한쪽이 이겼으며, 진 편은 음식을 만들어 같이 가무歌舞를 하며 놀았다.

모심기 노래(남도 들노래)

아득히 먼 옛날 신석기 이후로 농경을 주업으로서 해오는 동안에 밭농사에서 벼농사로 즉 수도작(水稻作)문화를 이루게 된다. 농작물 가운데서 가장 일손이 많이 가는 작물은 벼작물이다. 대체로 보면, 볍씨뿌리기, 모찌기, 모심기(모내기), 김매기, 벼베기, 타작, 거두어 들이기 등으로 대별한다. 힘든 작업은 원시적 사회 공동체의 단면이 배어 있어서 두레, 품앗이 라는 형태로 서로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였으며, 많은 수의 인원이 함께 공동작업을 하면, 으레 농악대가 다르게 마련이다. 일의 능률과 수고로움을 달래려고 말이다. 진도지방의 들노래와 나주지역의 들노래가 있다. 이들을 남도 들노래라고 부른다. 그리고 상주지역의 모심기 노래인 채연가도 있다.

서낭대싸움

정월 대보름날은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서낭대 싸움이라는 것이 있다.

동네 단위의 놀이로서는 줄다리기, 차전놀이, 고싸움, 등이 있다.  경남 창녕군의 영산지방의 놀이로서 "서낭대"라는 길다란 대나무장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경기를 하는데 서로 자기의 서낭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다른 편의 장대를 넘어뜨리는 놀이이다.

달집에 불이야 놀이(쥐불놀이)

음력 정월 달 14일에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논이나 밭두렁에서 불을 붙여 놓고서 돌아 다니며 노는 놀이이다. 주로 소나무의 간솔이라는 삭쟁이를 채취하여 옆으로 많은 구멍을 뚫은 놓은 빈깡통에 넣어 불을 붙은 종이나, 지푸라기, 숯을 같이 넣고서 긴 철사나 끈에 매달아서 빙글빙글 돌리며 그 회전력에 의하여 불이 붙어 환하게 밝히면서, 한해의 액운을 좇는 놀이이다. 지금은 산불이 일어날까봐 금하고 있다.

한겨우내 해충이 번식하는 논과 밭두렁을 태워서 소독하느 작용과 곳간이나, 창고 등에서 해를 끼치는 쥐를 호내기 위하여 밤에 환하게 하여 쥐를 잡거나, 쥐의 눈을 멀게 한다고 믿음에서 출발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엔 많이 하던 놀이이다. 그 당시엔 어린 여자애들도 같이 쥐불놀이를 하던게 기억난다.

백중(百中)놀이

경남 밀양지방에는 음력 7월 보름에 12간지에 의한 용날을 택일을 하여 백중놀이를 한다. 농번기이지만 이 날만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벅으면서 즐겁게 논다. 농신제農神祭, 작두 말타기, 춤판, 뒷놀이 등으로 진행해가는데, 용을 만들어 매달아 놓는다. 농신제는 농악을 울리며잡귀를 막는 굿을 행하는 것인데, 작두 말타기는 마을의 머슴들 중에서 모범적인 일꾼을 농사 장원壯元으로 택하여 놀이판을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다. 춤판이 되면 양반춤에서 시작하여 갖가지의 병신춤이 등장한다. 모든 놀이꾼들이 한꺼번에 어울려 농악에 맞추어서 춤추며 노는 뒷풀이로 마감한다. 이느 한해의 농사철 가운데 가장 바쁜 시기에 혹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농꾼들의 불만을 달래려고 일종의 지배층의 기만술책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푸짐한 음식을 마련하여 먹임으로서 달래어서 보다 유리하게 농사일을 시키려는 데서 비롯한다.

횃불싸움놀이 (炬火戰 거화전)

정월 대보름에 낮부터 싸리나무, 대나무, 볏짚 등으로 홰를 만들어 준비를 한다. 저녘에 농악대가 요란스레 울리고, 들판으로 나가 달이 떠오르면, 한쪽이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서 시비를 걸고, 상재편도 이에 응수를 한다. 젊은 남자들이 횃불을 들고서 휘두르면서, 상대방을 넘어뜨리거나 항복시키는 것이다.  단순한 놀이는 아니고 간혹 죽음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평소에 쌓인 울분과 화를 풀기 위하여 하는 놀이이다.

고싸움

한복의 옷고름에 보이는, 둥글게 말아 매듭을 지은 부분의 "고"와 사움이라느 말의 합성어이다. 볏짚으로 커다란 "고"를 만들고 이웃 마을과 고싸움을 하는 것이다.  굿놀이를 하면서 승리를 기원하고 "줄패장"을 가린 다음 줄패장은 고위에 오른다. 상대편의 고를 밀어 붙이거나, 내려 눌러서 땅에 닿으면 이기는 것이다. 밀고 밀리거나, 좌우로 빙글 도는 공겨과 방어를 하기도 한다. 상대편의 고와의 둥근 부분을 서로 연결하는 것은 일종의 옷고름 싸움으로서 여자의 옷고름 즉 성性행위와 관련이 많다. 일종의 협동정신과 함께 체력 단련, 일조의 의식적 다산 기원과도 통한다고 하겠다.

차전(車戰)놀이

견훤과 왕건의 싸움에서 유래한다고 하나 아직 뚜렷한 정설은 없다. 동체싸움이라고도 한다. 경북안동지방에 잘 보존되어 있다. "쇠머리대기"와 비슷하며 나무로 만든 소머리 대신에 "동체"라고 불리는 기구를 사용한다. 10여m되는 통나무 두 개를 서로 엇갈리게 한 다음 (젓가락 모양으로 "X ") 그 윗부분을 새끼로 동여 매고서 사람이 설수 있도록 앞부분에 판자를 얹어 다시 동여 맨다. 양편의 대표자는 그 위에 각기 올라 타고서 동여맨 새끼줄을 잡고서 서로 상대편의 차전을 내려 누르거나 하여 당에 닿도록, 혹은 상대방의 대표자를 밀쳐 떨어지도록 한다. 이긴 쪽은 자기가 신은 짚신을 하늘로 높이 던지며 함성을 지르고 진 쪽은 짚신을 치면서 통곡소리를 낸다.

양주소놀이굿

농경문화의 없어서는 안될 소의 강인함을 칭송하는 놀이이다. 농사일의 풍요와 번창, 집안의 흥성, 자손의 번창함을 기원한다. 경기도, 황해도에서 주로 행해지는데, 형태의 독특함과 "마부타령"이라는 가사도 독특하다.  무당과 악사, 마부馬夫 두명, 짚으로 만든 소머리에 멍석을 뒤집어 쓰고서 소의 역할을 하는 네명으로 구성된다. 소는 어미소와 송아지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마부가 부르는 노래와 함께 소의 춤이 시작된다. 마부의 노래는 소의 머리, 뿔, 눈, 입, 꼬리 드의 신체부위가 가지고 잇는 특징을 재밌게 풀이하여 구경꾼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축원祝願과 덕담德談, 살풀이를 한다.

쇠머리 대기(나무쇠 싸움)

경남 창녕지바의 영산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놀이로서, 나무로 된 쇠머리를 만들 때는 나무를 베겠다는 양해를 구하는 의식으로서 제사를 지낸다. 이때 이 나무쇠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깨끗한 몸가짐과 정성이 요구되며, 부정을 타면 신의 노여움을 받는다고 한다. 길이가 10m되는 통나무 세 개를 구하여, 윗부분을 하나로 동여매고, 아랫부분은 넓게 편 다음, 움직이지 않게 바닥에 더욱 굵은 통나무를 가로로 잇대어 고정시킨다. 머리부분이고, 끝나면, 6개씩의 통나무를 적당히 유지되게 가로,세로로 엮어서 몸통부분을 만든다. 나무쇠가 만들어지면 장정들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각각 "진잡이 놀이"를 한다. 양편의 세명의 장군들 (대장,중장,소장)이 말을 달려서 상대편의 진으 둟고 들어가 세력을 둘러보고 오는 일을 말하는데 놀이가 격렬해진다. 수백명의 장정들이 나무쇠를 울러매고서 그 위에 세장군을 태운 뒤, 상대편에게 접근전을 시도하면서, 접전이 벌어지고, 나무쇠가 부서지거나, 힘에 못이겨 밀리는 편, 나무쇠가 땅에 닿으면 진다.

뗑갈

오동나무의 속을 파내고 피리모양의 관管을 만든 것이다. 입을 대고서 불면 "뚜우뚜우"하는 소리가 난다. 농번기가 되어 마실에서 공동으로 들일을 할 때에 신호용으로 사용, 줄다리기, 차전놀이, 나무쇠싸움 등의 행사때에도 큰소리로 불어서 시작을 알린다.

씨름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7월 백중, 팔월 추석이면 열리던 놀이이다. 우승상으로서는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황소를 줬다. 서기AD5세기경의 고구려벽화인 각저총(脚저塚)에 씨름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군사용으로 훈련시에 사용한 듯하다.

샅바를 오른 쪽 다리에 끼고 하는 "왼씨름",  그 반대인" 오른 씨름", 허리에 띠를 매고 하는 " 띠씨름" 등이 있다. "팔재간", "다리재간",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하는 "들재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광대(五廣大)  / 덧배기춤

오광대(五廣大) 및 야류(野遊)는 경남 일대에 분포된 우리나라 가면극의 영남형이며 그 발생지는 낙동강변의 초계(草溪) 밤마리(栗旨)장터라고 전해 온다. 낙동강은 1930년대까지도 수심이 깊어 하운(河運)에 많이 쓰였고 안동으로도 소금배가 오르내렸다고 한다.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밤마리는 하항(河港) 또는 하시(河市)로서 인근의 의령, 합천, 고령, 초계 등이 물산의 집산지일뿐더러 특히 여름철에 함양, 산청 쪽의 삼(베)과 해안지방의 어염(漁鹽)과 기타 지방의 미곡 등과의 교역으로 난장을 트게 되면 온갖 상인들이 모여 각종 주색(酒色), 잡기(雜技)가 벌어지고 이때 대광대(竹廣大)패에게 거상(巨商)들이 돈을 주어 며칠씩 오광대(五廣大)를 놀게 하였다고 한다. 이씨조선 후반기의 이같은 사상(私商)들의 활동과 도시형 탈춤의 분포와의 상관관계는 흥미있는 일이다. 밤마리 장터에서 대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오광대놀이는 각지로 전파되어 의령,진주, 산청, 창원,통영,고성,김해 등지에 분포되고 다시 해로(海路)로 하여 수영,동래,부산진 등지로 퍼져서는 야유(野遊)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광대가 경상우도(慶尙右道)에서 전문극단에 의해 연희되던 가면극이라면 주로 경상좌도에 분포된 야류는 "들놀음"으로서 비직업적인 연희자들, 즉 마을 사람들에 의해 토착화된 놀이로서 농경의식과 결부된 시골형의 가면극이며 오광대보다 선행된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수영야류는 당제(堂祭)를 지낸 다음 등(燈)놀이를 하며 야류를 놀고, 동래야류는 줄다리기를 한 다음에 야류로 옮긴다. 오광대 놀이의 계통을 짐작케 하는 밤마리의 전승으로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 낙동강 홍수때 큰 궤가 하나 밤마리 앞 언덕에 와 닿았는데 열어보니 탈과 기타 탈놀이 도구가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손대기를 싫어 하였으나 인연이 있어 닿은 것이니 탈놀이를 해야 한다고 하여 놀게 되었다.  또 이 궤가 충청도 쪽에서 왔다고 하여 충청도에서 사람을 불러다가 놀았다."  이러한 현지 고로(古老)들의 이야기와 함께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낙동강 하류의 가락(駕洛)의 오광대도 궤가 떠 내려와서 놀게 되었다는 같은 전설을 갖고 있다. 오광대라는 이름은 오행설(五行說)에서 유래된 "五"에서 온 것이라는 의견이 유력하다. 진주와 마산 오광대에는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가 나오고, 오방신장무에 합치되는 오양반(五兩班)을 만들어 연출한다.   진주에서는 문둥광대도 다섯을 등장시키고 잇고, 그 문둥이 가면은 오방각색(五方各色)으로 만들었다.  통영과 고성오광대는 오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신라 오기(五伎)의 다섯 마당의 놀이와 연관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즉 밤마리 오광대는 현지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약70년 전까지 대광대패들에 의해 먼저 죽(竹)방을 받기를 비롯한 곡예에서 시작하여, "말뚝이""비비새(영노)""중과 각시""할미와 영감과 지대각시""사자(獅子)"등의 놀이장면이 있었다고 하니 현전(現傳)한 오광대와 동일한 주제가 그 당시부터 이미 정립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오광대의 연출형태도 다른 가면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춤이 주가 되고 재담(才談: 대사)과 노래(唱)와 동작이 곁들여 연출되는 탈놀이의 일종이다.  춤은 역시 염불(念佛), 타령,굿거리 등 민속무용에 쓰이는 반주곡이 사용되나 장단과 춤 역시 지방적 특색을 나타내어 꽹과리를 주조(主調)로 하는 장단에 맞추어지는 "덧배기춤"은 오광대와 야류만이 갖는 멋들어진 춤이다. 특히 동래야류의 말둑이의 춤과 통영오광대의 "문둥이춤"은 영남특유의 탈춤이다. 어느 무용이나 대개 손의 섬세한 움직임을 보이게 마련이다. 양주별산대나 송파산대의 소무(小巫)의 자라춤은 손의 섬세한 움직임으로 노장(老長)을 유혹한다. 그러나 통영오광대의 문둥이 양반춤은 손가락 하나 없는 손으로 문둥이 몽뚱어리 전체를 한 덩어리로 밀고 나가는 기분이 나쁠 정도로 표현이 강한 춤이다. 제 1과장인 문둥탈춤을 본대로 옮겨 보면,  ' 꽹과리가 주조(主調)인 느린 굿거리 장단에 맞춰 새면(악사 자리)을 향하여 문둥양반이 춤을 추며 등장한다. 흰바지 저고리에 왼쪽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손가락 없는 문둥이 손처럼 손을 오그리고 바른 손에 소고(小鼓), 왼손에 소고채를 쥐고 비틀거리며 두 팔로 우선 문둥이탈 얼굴을 가리고 등장하여 장단에 맞춰서 두 팔을 얼굴에서 떼고 한참 춤을 추다가 점점 빨라지는 장단에 맞춰 소고춤으로 추고 코를 푸는 시늉을 하고 주저앉아 진양조(晉陽調:24박 1장단의 가장 느린 속도)로 자탄가(自嘆歌)를 부른다. "

그러나 고성오광대나 동래야류에서도 제 1과장은 문둥 광대춤이 나오나 자탄가는 없고 한바탕 북춤을 추고 들어간다. 우리나라 가면극 중에서 오광대와 야류는 "말뚝이재담"이 주가 되고 양반에 대한 항거와 조롱은 가장 심하다.  오광대의 과장은, 통영오광대는 "문둥탈""풍자탈""영노탈""농창(弄娼)탈" "포수탈"의 5과장으로 되어 있고 고성오강대는 "문둥광대""오광대""승무""비비""저밀주"의 5과장의 구성이며 그 밖의 놀이들은 대체로 5내지 7과장으로 되어 있다.

통영오광대의 경우 등장인원수는 31명이며 가면 종류는 아래와 같다.

문둥이양반(1) 홍백가양반(1) 검정양반(1)비틀양반(1)곰보양반(1)조리중(1)원양반(1)두째양반(1)말뚝이(1) 영노(1) 영노양반(1) 제대각시(1)할미(1)할미양반(1)포수(1) 단보(1) 사자(1) 상좌중(1) 몽돌이(1)상주(2) 팔선녀(8) 봉사(1)

오광대 역시 처음에는 종교적 의의와 결부된 정월 대보름을 중심으로 행하여졌으나(통영,고성,수영,동래 등지) 통영의 경우처럼 나중에는 3월 보름이나 4월 초파일의 봄놀이, 9월 보름의 단풍놀이로서 오락적 연희로 놀게 되었다.  기우제 행사로 연희되는데 오광대를 놀면 비가 온다고 한다.

하회별신굿탈놀이 (하회가면 탈놀이)

종교적 신성가면(神聖假面)으로 제사의 대상도 되지만, 별신굿놀이의 연극용 가면으로 제각기 배역의 표정을 잘 살린 한 개의 미적인 가면이기도 하다. 가면을 축술종교적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하회가면의 아홉 개 가운데서  다섯 개는 턱을 따로 매달아 말을 하면 표정이 살아서 움직이며 각시, 부네,이매 등 탈은 그 표정이 완전히 한국화된 얼굴들이다.  

봉산탈춤  황해도 탈춤

황해도 지방의 탈춤은 그 가면,의상,무법(舞法) 등 형식적인 면과 대사내용으로 보아 봉산탈춤형과 해주탈춤형으로 대별한다. 황주(황주),평산(평산0, 종산(봉산)등지의 봉산탈춤이 태표하는 평야지대 탈춤과 해주(해주),강령(강령),연백(연백) 등 해주탈춤이 대표하는 해안지대 탈춤으로 황해도 탈춤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황해도의 주요 읍(邑)들은 농산물과 수공업의 교역지이며, 또 소도시로서 탈춤공연을 뒷바라지할 많안 여건을 갖춘 고장으로 오일장(五日場)이 열리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 탈꾼들을 불러서 1년에 한번씩은 놀았다고 한다.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의 하나인 강령탈춤의 다른점은 아래와 같다. 첫째, 가면의 차이는 강령탈은 보다 사실적인 탈로 이른바'인물탈'이라고 하는데 반해 봉산탈은 8목중, 노장(老長),취바리탈과 같은 귀면형(鬼面型)의 이른바 '목탈'이 주요한 배역을 맡는다. 황해도 지방의 탈끼리의 차이일 뿐 아니라 중부지방의 양주별산대탈이 바가지탈이며 비교적 사실적인데 반하여 종이탈인 봉산탈은 요철굴곡이 심하여 나용면(儺用面)이나 서장계(西藏系)가면을 방불케하는 바가 있다.  

둘째, 의상을 보면 강령탈춤에서는 주로 회색칙베장삼을 공통으로 입으며 그 소매 홍태기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다. 봉산탈춤의 의상은 좌청우홍(좌청우홍)의 원동에 초록색 소매를 단 더거리를 입는다. 이러한 하려한 더거리에 붉고 푸른 띠를 띠며 소매에는 흰 한삼(한삼)을 달아 그것을 휘두르면서 춤을 추는 모습은 고구려이래의 장수무(장수무)의 전통을 생각케 한다. 그리고 다리에는 행전을 치고, 웃대님을 맨다.

셋째로 무법(무법)에서 보면 강령탈춤은 느린 사위로 긴 장삼 소매를 고개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의 춤을 주는데, 이것을 '장삼춤'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봉산탈춤은 한삼 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혹은 손에 드린 한삼을 경쾌하게 휘뿌리면서 두 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 하는 도앚ㄱ의 이른바"깨끼춤"이다. 목중의 ㅃ바른 춤은 오광대의 말뚝이 춤과 함께 감히 건무(건무)의 유풍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봉산탈춤의 과장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누어 제 1과장4상파춤, 제2과장 8목중춤, 제3과장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제1경노장춤,제2경 신장수춤,제3경 취바리춤), 제5과장 사자춤,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미얄춤 등이 된다. 이들 과장중에서 8목중춤, 사당춤, 사자춤 과장이 양주별산대 놀이와 다르다. 봉산탈춤은 결국 목중, 노장,양반 및 미얄의 네 개의 독립된 놀이에 사당춤, 사자춤과 원숭이 놀이가 곁들여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34인이나 거사와 사당은 목중탈과 소무탈을 겸용함으로 사용하는 가면은 27개가 된다.   봉산탈춤은 이북 지방의 큰 명절인 단오날 밤에 주로 연희된 놀이로서 (전에는 양주별산대 놀이와 마찬가지로 사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함), 길놀이와 고사에 이어 상좌춤으로 시작되고, 또 끝장면에서 무당인 이얄의 죽음과 함께 지노귀굿으로 끝나고 벽사(벽사:요귀를 물리침)의식의 마지막 절차로 놀잉에 쓰던 가면을 모두 불사른다. 단오가 시기적으로 모내기 직전의 방중한(망중한)이요, 이 때의 놀이인 봉산탈춤은 곡식의 생장의례(생장의례)와 벽사행사로서, 또 하지(하지)의 축제로서 민속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봉산탈춤은 다른 고장의 가면극에 비해 신앙적 의의보다는 민중오락적 요소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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