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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작과정 대장경판의 목재는 뻘밭에 3년 간 묻었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벌목한 나무는 오래 방치해야 숨이 죽는데, 자연상태로 놓아두면 갈라지기가 쉽지만, 뻘에 묻어두면 갈라지지도 않으면서 나무 결도 삭혀져 판각에 더없이 좋은 목재가 되기 때문이다. 통나무는 경판크기로 다듬어져 판각에 쓰인다. 2. 제작기간과 규모 1-2m짜리 통나무 한 개당 가능한 목판 수는 대여섯 장, 따라서 8만여 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통나무 만5천 개 이상이 필요하다. 또한 필사가들은 경전을 일일이 베껴 써야 했는데 하루에 한 사람이 천 자 정도 쓸 수 있다고 가정하면 5천만 자를 전부 쓰는데 필요한 연 인원은 5만 여명이다. 여기에 한지제작과 판각, 경판의 옻칠 그밖에 내용 교정과 구리 장식 만들기 등 제작에 동원된 인원은 엄청나다. 3. 제작 배경 팔만대장경의 경판 하나하나, 글자 한자 한자에는 고려의 총력이 담겨져 있다. 이 경판이 만들어지던 때는 고려가 몽고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몽고는 당시 아시아 대륙 거의 전역을 석권했던 신화적인 정복 국가였다. 4. 대장경의 판각지 남해는 진주 아래쪽에 있는 섬으로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당시 몽고는 육지의 거의 전역을 휩쓸고 다녔지만 남해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또한 남해는 물길을 통해 목재를 운반하기도 쉬운데 그 장소로 꼽히는 곳이 관음포이다. 5. 해인사 장경각 경판 한 장의 무게는 3kg정도, 8만장을 모두 합치면 오늘날 2.5톤 트럭 100대 분이다. 몽고군을 피해 강화도에 보관되었던 경판들은 지금까지 경남 합천 해인사에 있는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다. 강화판당에 있던 대장경이 언제 이 곳 해인사로 옮겨지게 되었는지 그 경로를 추적한다. 6. 일본의 관심 일본은 고려 말부터 조선 조까지 끊임없이 대장경을 요구했다. 일본 사신이 대장경판 약탈을 모의하는 서한을 본국에 보내기도 했고, 세종 때에는 일본사신이 대장경을 달라며 단식하는 소동도 빚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 왕은 대장경을 얻지 못하자 조선 사신을 냉대했고 사절단에게 보복을 하려는 왜인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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