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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해전사 불멸의 금자탑 - 명량해전 정유재란이 한창인 당시, 일본 전투선단은 조선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우수영을 칠 목적으로 전라도 해남의 어란진에 출항한다. 이순신이 이끈 13척의 전함은 먼저 울돌목 앞으로 나가 불과 2시간 만에 전함 333척에 이르는 일본 전투선단을 무찌른다. 아군피해는 고작 70명, 일본군 사상자는 최소 8천 명, 31척 격침. 조선군은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설욕했다. 2. 조선수군의 궤멸 - 칠천량 해전 일본측이 자랑하는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대패하여 전멸상태에 달한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해상권을 획득하고 식량과 물자를 보급함으로써 한양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측 장수는 원균이었다. 이순신은 혼란스러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백의종군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3. 이순신의 복귀, 수군의 재건 칠천량 해전의 패배이후 위기를 느낀 조정은 이순신을 삼군수도 통제사로 재임명한다. 그 때 남은 전함이 불과 13척. 조정에서도 겸연쩍었던지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으로 결합하라’고 권유해 왔다. 그러나 이순신은 수군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13척만으로 수군의 재건에 나선다. 4. 승리 요인(1) - 전함 바야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전함은 뱃머리가 뾰족하고 판자의 연결에 쇠못을 사용한 안택선, 그리고 조선군의 전함은 뱃머리가 둥글고 나무못을 사용한 판옥선. 뱃머리가 둥글다는 것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 회전이 용이하였고, 반면 쇠못은 녹이 슬어 부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5. 승리요인(2) - 함포 조총을 들고 상륙한 일본군은 육지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해전에서는 조선의 함포를 당할 수 없었다. 또 일본 군함은 약해서 포를 메달 수 없었던 반면 조선 수군의 포는 배에 장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13대 333의 열세를 모두 만회할 수 없었다. 6. 울돌목의 지형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은 물살이 세기로 이름나 있다. 밀물 때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게 된다. 일본군 역시 울돌목의 특이한 조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수군과 해적이 융성했던 일본이었던 만큼 바다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7. 이순신의 전략 일본군은 해협에 설치된 ‘철쇄’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폭이 가장 좁은 지점에 쇠사슬을 걸어 뒀다가 당겨서 일본 전함을 걸리게 했다. 오후 1시. 물길이 정지하고 이내 썰물이 닥치면서 걸려있던 일본 함대는 서로 부딪쳐 파괴되었다. 쇠사슬과 울돌목의 물길이 명량해전의 승리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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