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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양행궁의 흔적 영괴대라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와, 신정이라는 온천수가 온양행궁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지만 행궁은 그저 흔적만 존재할 뿐 이미 역사에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온양행궁은 왕의 휴식처가 아닌 온천숙박업소로 전락한 것이다. 2. 사라진 궁궐의 모습 보통 행궁이 왕이 머물다가는 곳이라 행궁과 왕이 머무는 건물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온양행궁에는 온천을 할 수 있는 별도의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장기간 머물게 될 왕을 위해 언제든 국정을 볼 수 있게 궁궐의 특징을 그대로 옮겨온 궁궐의 축소된 형태였다. 그 상세한 언급은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기까지 기록을 담은 ‘온궁사실’에 자세히 전한다. 3. 왕이 온양행궁에 머문 이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5명의 임금과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을 다녀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곳에 오게 되면 보통 한 달이 넘는 장기간의 긴 일정으로 머물렀다고 한다. 역사서를 보면 당시 피부질환은 쉽게 치료되지 않았는데 어의들은 온천이 효과가 있다고 처방하였다. 4. 왕의 목욕 왕은 어떻게 목욕을 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목욕과 관련한 기록을 극히 제한하고 있지만 연산군 일기에서 그들의 생활을 유추할 수 있었다. 거대한 탕실과 화려한 목욕용품, 왕의 목욕을 거드는 사람들... 5. 온양행궁의 효과 온양온천의 발견은 백제 때까지 올라간다. 다리를 다친 학이 온천에 발을 담그고 다리가 나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조선의 왕들이 온천을 찾은 것은 온양행궁의 의술적인 치료효과 때문이었다. 세종은 병에 차도가 있어 마지막으로 온양에 다녀온 이듬해, 훈민정음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6. 온양행궁 - 또 하나의 궁궐 왕들은 휴식과 질병치료를 위해서만 이곳에 머물렀던 것일까? 대개 온양행궁에 행차한 왕은 짧게 1주일에서 길게는 두 달 이상 머무르게 된다. 왕들은 단지 온천욕으로 질병치료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곳에 머물면서, 지역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고, 또 다른 국정을 보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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