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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조와 종의 차이

천지인야 2013. 9. 9. 10:42

옛날에는 임금이 될 사람은 본명을 쓸 기회가 없었다. 왜냐하면 왕자 시절에는 나리로, 세자나 태자가 되면 저하 또는 전하로, 왕위에 오른 뒤에는 전하나 폐하 또는 상감마마로 불렸기 때문이다.
임금이 자기 본명을 쓸 때는 외국에 외교문서를 보낼때 뿐이었다.
또 임금이 죽은 뒤에는 그 공덕을 기리고, 왕실의 조상들을 모신 종묘에 묘호를 지었다고 한다. 묘호는 세상을 뜬 왕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묘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일도 중요해서 이를
<국장도감의궤>에 기록해 두었다.
때로 종과 조를 고치거나, 미처 묘호를 정하지 못했을 때는 따로 도감을 두어 기록했다.
묘호는 중국에서 먼저 시작된 것으로, 왕조의 창시자를 태조라고 지었다. 또 그에 버금가는 공로자를 태종이라 칭했다. 또한 세조라는 묘호는 단절될 뻔한 왕실을 다시 부흥시킨 경우에 붙였다. 수양대군인 세조와 원나라의 쿠빌라이 세조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신라 법흥왕 때에 임금의 시호를 처음 사용했다. 그는 '지증'이라는 묘호를 죽은 부왕에게 붙여주었다.
묘호는 임금이 재위기간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을 평가하여 붙이는 이름이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신라 법흥왕은 불교를 진흥하고 율령을 공포한 업적을 기려 붙은 묘호다.

조선시대의 세종은 많은 정책을 실시하여 국가를 안정되게 이끌었기에 붙은 이름이었고, 성종은 제도를 튼튼히 세워 국가기반을 완성했기에 정해진 이름이다. 그러나 묘호를 짓는 과정에서 후대 임금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정하거나 이미 지어 놓은 묘호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로 조선시대 16대 임금 인조의 묘호는 원래 열조였다. 인조가 왕으로 있는 동안 청나라의 침략을 두 차례나 받고 국내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하여 붙은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이 크게 격노하며 반대하여 '열'자가 '인'자로 바뀌어 인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왕계표에서 묘호 뒤에 붙는 조와 종은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
왕으로 있는 동안 외적의 침입과 국내에 난이 일어나면 임금의 묘호 뒤에 "조"를 붙였다고 한다. 반면 "종"은 나라 안밖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며 무리없이 왕위를 이은 임금의 묘호 뒤에 붙인 거였다.
또한 대표적인 예로 세종은 한글을 창조하는 등 백성의 생활을 안정되게 이끌었으며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려 붙은 묘호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임금을 한 적이 없는데 묘호를 받은 사람도 있고, 임금이 되어도 묘호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니 그게 어찌된 것일까?
즉 태자 시절에 죽은 성종의 아버지 덕종과 인조의 아버지 원종, 정조의 아버지 장조, 순조의 아들 익종 등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어도 어엿하게 묘호가 있었다. 왜냐하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태자 시절에 죽었어도 종묘에 모시고 묘호를 붙여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반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연산왕이나 광해왕은 묘호나 시호를 받지 못하고, 왕 대신 '군'을 붙여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그들은 불효자이자 패륜아로 찍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왕실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에서도 제외되어 <연산군 일기>와 <광해군 일기>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