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文話/♧ 雜說

유곽(遊廓)

천지인야 2016. 6. 23. 13:19

공창들을 집창(集娼) 방식에 의해 일정구역 내에 집단적으로 거주시키던 장소.

일본에 유곽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그는 1585년 오사카[大阪]의 게이세이초[傾城町]를

유곽으로 공인했으며 다음해에는 교토[京都]에도 유곽을 허가했다.

이를 이어받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시대에는 25개의 유곽이 있었으며 특히 에도[江戶]의 요시와라[吉原]에는 2,000명이 넘는 공창과

다수의 고용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 교토의 시마바라[島原], 오사카의 심마치[新町] 등도 유명했는데 이들 유곽은 일본의 문학작품과

우키요에[浮世繪]의 창작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메이지[明治] 정부하에서도 유곽은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계속 존속했는데 1930년에는 511개의 유곽에 5만 여 명의 공창이 있었다.

그러나 1956년 국회에서 통과된 매춘방지법이 1958년 4월에 발효되면서 유곽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의 유곽은 단순한 매춘지대에 불과하지만 에도시대[江戶時代]의 유곽은 연극과 함께 오락의 2대 기관이었으며

 연극, 사미센[三味線] 음악, 문학, 회화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당시 유곽에는 무사·관리·호상 등이 출입했으며 유녀(遊女)들에게도 높은 교양을 요구했는데

유녀의 최고지위인 타유[太夫]는 용모보다도 기예와 지식이 자격요건으로 더 중요시되었다.

유녀와의 술자리에는 〈겐지모노다리 源氏物語〉가 준비되고 고대의 시가가 암송되는 등 일본의 유곽은

중세의 귀족적 고전문화를 계승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에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함께 1902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역에 유곽이 처음 생기면서

 인천·원산·서울 등으로 퍼져나갔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의 도시에 유곽이 성행했다.

그러나 일본에서와 같은 문화적 기능은 전혀 없었으며 단지 창녀를 모아놓은 집창구역에 불과했다.

한국의 유곽은 1947년 10월 미군정청의 공포한 공창폐지령에 따라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다음백과)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있었던 일본인 유흥업소.

[개설]

최초의 유곽은 부산에 1902년 만들어졌으며 대규모의 공식적 유곽인 공창은 서울의 신정 유곽[1904년]이 시초였다.

군산은 청·일 전쟁 후 일본에서 일확천금을 쫓아 불나방처럼 모여든 일본의 모리배들로 뒤덮였다. 이들의 초창기 사업이라는 것이 고리대금업과 토지 브로커 등이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인들은 돈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자들이었는데 이들에게 있어 유곽은 또 다른 황금 알을 낳는 사업일 뿐이었다.

군산의 유곽 사업은 1900년대 후반 일본 관리와 지역 유지들이 앞장서서 만들었다. 당시 유곽 설립에는 상당한 이권이 달려 있어 유곽이 들어설 후보지를 서로 자신의 땅에 유치하려는 지주들 간의 상당한 갈등과 혼란이 있었다. 당시 후보지로는 신흥동 산수정[현
명산 시장]과 팔마산 동쪽 평지[경장리] 그리고 경포리 부근 해변가[고속 터미널 부근] 등 3곳이 경합을 벌이다가 결국은 신흥동 산수정이 선정되었다. 이 땅은 군산의 금융왕이라고 불리던 사토오[左藤]란 자의 땅이었다. 사토오는 본래 논과 작은 저수지가 있던 이 지역 넓은 땅을 싼 가격에 매입하여 그 중 유곽이 들어설 오천 평을 일본 민회에 무상 기증함을 조건으로 내세워 다른 유곽 후보지 둘을 물리치고 유곽을 유치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유곽이 들어서면서 주변 지역 땅 값이 상승하여 큰 재산을 일구는 경영의 묘를 발휘한 자이다.

당시 유곽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일본 민단 내에 선정 위원회까지 구성되었고
군산 이사청[1905년~1910년]의 이사관이 직접 관여했음을 볼 때 유곽의 설치가 군산 지역 일본인들의 최대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후 현 신창동 인근에 소규모 유곽이 또 한 군데 설치된다. 1930년대 군산 명산동 유곽에는 일본인 유곽이 8곳으로 61명의 창기가 있었고 조선인 유곽은 3곳[금강루, 청남루]으로 26명의 창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공식 조사에서 빠진 숫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인 유곽에는 일본 여인이 대부분이었으나 일본 옷을 입은 한국 여인도 조금 섞여 있었고 한국인 유곽에는 한복을 입은 한국 여인만 있었다고 한다. 유곽의 출입 비용은 3원 내지 5원씩 했는데 당시 쌀 한 말이 1원 50전이었으니 쌀 두 말 가격이라는 거금이 필요했다.

유곽 여인들의 화대는 정복자였던 일본 여인들이 한국 여인들보다 1원 정도 비쌌다고 한다. 유곽에 손님이 들어오면 나이 먹은 여인이 손님을 맞이하여 거실로 안내하고 거실에는 그 유곽의 여인들 사진이 걸려있어 손님은 사진을 보고 여인을 선정했다고 한다. 여인이 결정되면 손님은 방으로 안내되어 작은 상에 담겨 나온 차와 쎈비 과자를 먹으며 여인을 기다리는 게 순서였다. 당시 유명했던 유곽은 현재도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칠복[
명산동 화교 소학교]과 군산루[명산동 코스코 마트] 그리고 그 주변의 송학루, 송야, 옥가 등이다.

1956년
장미동에 있던 화교 소학교가 옮겨와 자리한 칠복(七福)은 1925년 만들어진 목조 2층 건물로 당시 유곽의 흥청거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유곽들이 자리하고 있던 명산동 시장 안에는 아직도 옛 유곽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군산의 유곽은 일제 강점기 번성을 누리다가 해방 후 미 군정청의 공창 제도 폐지 방침[1948년 2월 14일]에 의거 폐지되었으며 6.25 후에는 피난민들의 임시 수용소로 사용되어 유곽 한 곳에 30여 가구가 생활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은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어 ‘유곽 시장’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명산 시장이라 칭하고 있다.

군산의 유곽은
명산동 외에도 영화동의 일본인 시장 주변에 고급 요정의 형태로 존재하였는데 해방 후 이곳은 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한 유흥업소로 변신을 하여 미국인 거리가 조성되었다. 이후 미성동의 아메리카 타운이 만들어져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군산향토문화백과  김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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