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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의 혼이 깃든 ‘굴포천’

천지인야 2013. 2. 6. 18:19

열녀의 혼이 깃든 ‘굴포천’
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21)
2008년 07월 11일 (금) 00:00:00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집회의 영향으로 ‘대운하 건설’을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개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다. 한때 서울시와 경기도, 김포시가 대운하 건설 이슈를 틈타 대운하 첫 출발지로 예정된 한강하구에 대한 개발 이슈들을 앞 다투어 쏟아놓은 적이 있다. 한강하구 개발 이슈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중단됐던 경인운하 사업 또한 재개하려는 노력들이 솟아오르고 있다. 처음 홍수예방 차원에서 굴포천을 정비하려하던 것이 운하로까지 확대되었다. 여기서 경인운하의 개발이 타당성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김포의 평야를 도도하게 흐르는 굴포천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적 흔적을 찾아보고자 할 뿐이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7년(1681) 6월3일자 기사를 보면 김포의 첫 관문인 고촌면의 굴포천에서 있었던 사건 이야기가 기술되고 있다. 병조판서 이숙이라는 사람이 임금에게 한 여인을 정려해줄 것을 건의했는데 임금이 허락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정려라 함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을 말한다.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병조판서 이숙이라는 사람이 청나라 군에게 당시 자신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던 여인이 굴포천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전 부사였던 이시빈이라는 이의 처가 되는 사람으로서 성은 우씨다.

왜 정려로 표창을 상신해야 했는지 실록본문의 내용을 보자.

“<중략>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숙이 말하기를, ‘신이 정축년(1637 인조15년)의 변란(變亂) 때 사로잡혔는데, 전(前) 부사(府使) 이시빈(李時彬)의 처(妻) 우씨(禹氏)도 구략(驅掠)당하던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포(金浦) 땅의 굴포(掘浦)가에 이르러 그 지아비와 서로 이별하게 되자, 곧 물에 뛰어들어 오랑캐의 화살을 무수히 맞고는 죽었습니다. 그 절의(節義)의 뛰어난 바가 이와 같은데, 오히려 정표(旌表)한 일이 없으니, 어찌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명하여 특별히 정려(旌閭)하도록 하였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밝힌 ‘변란’ 즉 병자호란에 대해 이해가 되어야 한다.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14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간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을 정묘호란으로 말한다. 이때 조선과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일단락됐으나 1632년 후금은 조선과의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로 고칠 것과 황금, 백금1만냥, 전마 3천필, 세폐와 정병 3만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거절하고 후금과 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10만 대군으로 조선을 쳐들어왔다.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였고 결국 청군에 의해 포위를 당하고 마침내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인조가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고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청은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녀자들을 납치해 갔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을 굴복시키고 전쟁전리품으로 삼기위해 수많은 부녀자들을 납치해 가는 과정의 모습을 당시 함께 납치당했던 병조판서 이숙이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병조판서 이숙이 당시 납치당했던 때의 나이가 11살이었다. 11세 때 병자호란으로 포로로 선양에 붙잡혀 갔다가 회은군의 주선으로 귀국했다. 이숙은 이후 1648년 진사에 합격하고 1655년(효종 6) 문과에 급제, 한림(翰林)을 거쳐 삼사(三司)에 출입하였으며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숙은 병조판서가 되어 당시 본인과 이시은의 처 우씨와 함께 청나라 군사에게 납치를 당해 끌려가고 있을 때 고촌면 굴포천에 이르러 우씨가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의로 투신했던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11살 나이의 이숙은 훗날 우씨 여인의 절개를 높이 사 열녀로서 정려하도록 임금께 건의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촌면의 굴포천은 이렇듯 우씨 여인의 오랑캐의 겁탈을 끝내 거부하고자 했던 절개의 정신이 깃든 곳이라 말할 수 있다.

김포로 들어오는 48번 국도에서 첫 개천을 만나는데 이 개천을 굴포천이라 한다. 굴포천은 인천시 북구 부평동에서 시작해 김포시 전호리 벌판을 거쳐 영사정으로 흘러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21키로에 이르는 하천이다.

고려 고종(1213~1260)때 최충현의 아들 최이가 삼남지방에서 곡물 등을 싣고 바다로 이동하는 배가 강화 손돌목에서 자주 조난당하므로 이 위험한 지역을 피하기 위해서 만월산 칠성약수터에서 발원하여 부평벌을 가로 질러 한강으로 흐르던 하천을 개조하고 인천 제물포쪽과 연결해서 배가 다닐 수 있는 수로를 개설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후 조선 중종 때(1534) 김안로가 실제 공사를 추진하여 ‘판개울’이라는 하천이름으로 붙여지고 이를 한문으로 풀어서 굴포(掘浦)라고 한 것이 지금의 굴포천(掘浦橋)이라는 것이다.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산천편에 “굴포는 현의 동쪽 17리에 있으니 인천부의 정항이 근원이다. 북쪽으로 흘러 고도강을 지나 통진현의 연미정강으로 들어간다. 매년 다리를 놓았는데 그 비용이 적지 않아 본현 출신 양성지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도선을 두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교량의 ‘신증’란에는 굴포교로 기술되어 있다.

헌종 8년(1842년)의 <김포군읍지>에는 굴포교가 부평쪽에서 발원한 시내위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대동지지>의 ‘교량’편에는 석조로 서울로 통하는 대로에 있다고 했고, ‘산수’편에는 “고려때 최이가 도랑을 파서 바다와 통하게 하려 했으나 중지했고 본조의 김안로가 다시 시작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사료는 인천의 원통고개와 암벽 때문에 포기했다고 전한다. 또한 김포시 고촌면 전호리 마을에는 굴포천 운하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김자점이 역적모의를 할 때 이 운하를 하루저녁에 팠는데 부평의 원통고개를 못 뚫고 발각되었단다. 운하를 완성하지 못하고 발각되어 원통하다고 탄식했다 하여 원통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굴포천은 역사적으로 두 번씩이나 운하공사를 시도했었지만 다 실패했다는 기술하고 있다. 혹시 이 실패의 또 다른 원인이 있다면 굴포천에서의 오랑캐로부터 절개를 지키려했던 우씨 부인의 넋이 굴포천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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