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浦/◑ Panorama

김포의 지명유래

천지인야 2013. 2. 7. 23:22

김포 땅이름유래는 투금포가 아니고 감바위이다

이형석(교박,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해양지명위원)

♤ ‘김포’는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인 ‘투금포’(投金浦)에서 비롯되었는가?
‘고려 말에, 지금의 양천 공암나루 부근에 살던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다. 어느 날
형제는 나루에서 금덩어리를 두 개 얻어 한 개씩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다른 손들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배가 강 중간에
이르렀을 때 아우가 그 금덩어리를 슬그머니 던져 버렸다....형이 이에 "너의 말이 옳다" 하며 형도 금덩어리를 강에 던져 버렸다. 배에 함께
탄 많은 사람들이 형제의 우의에 감동하여 그때부터 여기를 투금포(投金浦)라 불렀다.’ <한국 민속문화 대백과 사전>

이 설화는 위치적으로 서울 양천구 공암(空岩)에 얽힌 설화로, 공암나루는 김포일대의 옛고을 이름(5개 현) 중, 김포(黔浦)현과는 다른 공암현에 속한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김포(검포)는 고려말 보다 수백년 먼저인 삼국시대의 땅이름이며 이 내용은 사서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전설로 전해온
설화이므로 김포의 유래와는 관련이 없다고 판단된다. 김포는 고구려의 강역이 된 장수왕 63년(475) 이전에 백제의 영역이었고 땅이름의 기층은
백제어이다. 흔히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동성현(㠉山縣; 백제계 지명 추정)은 본래 고구려 동자흘현(童子忽縣; 북방계
추정지명)으로 달리는 동산현(一云 㠉山縣)이라 하며 (신라) 경덕왕 때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최초의 명칭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이를 근거로 김포의 명칭은 고구려 때 최초로 기록하고 있는 사례가 많으나 실은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하고 있었던 493년 동안
김포는 백제의 땅이었고 백제의 땅이름(地名)이었다. <삼국사기>에 김포일대의 옛 고을이름(5개 현)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경덕왕이
고친 지명→고구려 때 지명→고려의 지명’ 순으로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공암현(孔巖縣)은 본디 고구려의 재차파의현(齊次巴衣縣)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도 그대로 쓴다. / ▷술성현(戌城縣)은 본디 고구려 수이홀현(首爾忽縣)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의
수안현(守安縣)이다. / ▷김포현(金浦縣)은 본디 고구려의 검포현(黔浦縣; 백제계 지명추정)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도 그대로 쓴다. /
▷동성현(童城縣)은 본디 고구려 동자홀현(童子忽縣)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도 그대로 쓴다. / ▷분진현(分津縣)은 본디 고구려의
평화압현(平淮押縣)이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의 통진현(通津縣)이다.

♤김포현은 고구려의 검포현(黔浦縣)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
1145년 고려 인종 때 발간된 <삼국사기>에는 위와 같이 ‘김포현은 본디 고구려의 검포현(黔浦縣)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金浦縣)으로 지금도 그대로 쓴다’하였고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김포현은 본래 고구려의 검포현(黔浦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장제군(長提縣; 부천)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도 그대로였고 명종이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본조(朝鮮) 태종 19년에 양천을 없애서 본현에 합병하고 금양현(金陽縣)이라 하였다. 뒤에 양천을 금천(衿川)에 합병하고 본현은 부평부와
합병하였다가 16년에 다시 현으로 만들어서 영(令)을 두었다.’고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포’의 뿌리는 ‘신성한 포구 또는
나루’란 의미의 검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5곳의 김포지역 중 ‘김포현’편에 유일한 진도(津渡)로 감암진(甘岩津)이 기록되었다. 즉
‘감암진은 (金浦縣) 북쪽으로 8리이니 바로 고양의 임의진(任意津)의 소로(小路)이다.’고 하였다. 한사군(漢四郡)시대나 삼국시대 초기에는
대수(帶水)라 불렸고 광개토왕비에는 아리수(阿利水)라 기록되었으며, <삼국사기>에는 욱리하(郁利河)로 나타나 있는 한강(漢江)은
백제가 동진(東晉)과 교류하면서 중국식 명칭인 한수(漢水)가 되었다. ‘한’의 뜻은 ‘크다’ 또는 ‘신성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강의
하류지역은 신석기시대부터 문화발달의 터전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초기 수도(河南慰禮城)였으며 이어 고구려·신라가 장악, 3국간의 군사적
쟁패지가 되었다. 특히 현 하남시(河南慰禮城)에서 김포의 북쪽에 이르는 한강은 백제왕이 내왕하였던 신성한 강으로 <삼국사기>에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왕 24년(369) 9월에 고구려왕 기유(斯由-故國原王)가 보병과 기병(騎兵) 2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양(雉壤-황해도
白川)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침탈하였다. 왕이 태자(近仇首)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곧장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군을 급히 쳐
깨뜨리고...11월에 ‘한수(漢江)남에서 대열(大閱)하였는데 깃발(旗幟)은 모두 황색으로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었으며 ‘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오므로 왕이 듣고 패하(浿河-禮成江) 강변에 군사를 매복 시켰다가 급히 공격, 고구려병이 패배하였다. 겨울에는 왕은
태자와 더불어 정병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斯由-故國原王)는 이를 막아 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즉 백제의 평양성공격은 한강 남에서의 열병과 예성강 강변에 군사를 매복한 사실 등을 미루어 육로가 아닌 수군 즉
하로(河路)와 해로(海路)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것은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광개토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수군을
이끌고 관미성을 비롯, 하남위례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과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책에 ’진사왕(辰斯王) 7년(391) 왕은
국서지방의 대도(大島)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왕은 친히 사슴을 잡았다.‘고 기록, 김포의 북쪽 한강은 왕이 다니던 신성한 곳(江)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김포의 군이름인 검포(黔浦), 금릉(金陵)과 고양의 임의진(任意津)과 통하는 감암진(甘岩津), 검단(黔丹), 왕길리 등 왕
또는 신성한 곳(한강 또는 대곡리의 존장 등)에서 비롯된 명칭이라 추정된다. 그리고 고양의 임의진 또한 ‘임금의 나루터’로 ‘임’ 또한 ‘감,
검, 곰, 금’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 보면 하남위례성이었던 광주의 검단산(黔丹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김포의
검단(黔丹), 북쪽으로 첨마산 북쪽의 검단산(黔丹山), 수락산 남쪽의 검암산(劍岩山)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모두 ‘신성한 곳이라는 검’과
관련이 있는 땅이름들이다. 1985년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 17 (경기편)‘김포군 김포읍 운양동(雲陽洞)’편에 ‘감바위,
감바위-나루, 감바윗-개’ 등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감-바위(감바윗개, 감암포, 감암)<마을>; 감바위가 있는 마을.
▶감-바위(대감바위, 감암)<바위>; 샘재 북동쪽에 있는 바위. 넓이 약 8평. 한강 쪽으로 쑥 내밀어서 잔교처럼 되어 김포에서
파주로 건너가는 천연적인 나루터. (조선) 선조 때 중봉 조헌(趙憲)이, 조정에서는 당파 싸움에만 급급하고 국방은 소홀이 함을 미워하여 벼슬을
내놓고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하면서 앞으로 있을 왜적의 침입을 미리 알고 상소를 하였으나 도리어 혐의만 받다가 마침내 임진 왜적의 침입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회복하고 금산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이 바위를 대감바위라 하다가 줄이어 감바위 또는 감암이라 함. ▶감바위-나루(감암포나루,
감암진)<나루>; 감바위 앞에 있는 나루. 고양군 송포면 이산으로 건너감. ▶감바윗-개(감암포)<마을, 개>; ①→감바위.
②감바위 앞에 있는 한강의 개. 위와 같이 김포의 북쪽 한강은 왕이 내왕하던 신성한 강이었으며 ‘김포’의 땅이름은 ‘신성한 나루(浦)’란 뜻의
‘검포’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검포에는 천연적인 나루인 감바위가 있어 ‘감암, 감바위’라 불렀고 이 나루를 감암진이라 하였으며
이곳 마을이름이 ‘감바위’마을이란 사실로 미루어 이 지역의 대표적인 땅이름인 ‘검포’가 탄생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1860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김포의 북서쪽, 한강변에 ‘감암’(甘岩)이 표기된 것을 비롯, 1861년경에 발간된 고산자의 ‘동여도’(東與圖, 규장각소장)에도
‘감암’(甘岩)이 표기되어 있는데 검단은 육로로 서울-김포에서 통진-강화로 통하고 한강을 건너 고양의 임의진(任意津)으로 통하며 한강 상류에서
하류-바다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감암의 ‘감’(甘, 監)은, 검(儉, 劍, 黔), 감암(甘岩), 거물(巨勿),
금마(金馬) 등과 같은 뜻이며 ‘검포’(黔浦)는 감암(甘岩)나루와 같은 의미이고 ‘김포’는 ‘검포, 감포’에서 비롯되어 우리말의 변천사항에서도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강 하류에 위치한 천연적인 나루터인 ‘감바위(甘岩)나루’는 김포지역의 관문으로 이 바위를 통하여
김포지역으로 상륙하여 ‘검포-김포’의 지명이 유래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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