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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탄자의 꼬리표 현재 정창원에는 꼬리표가 붙은 양탄자 두 장이 있다. 이 꼬리표는 처음부터 붙어있던 것으로 구입 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왜 이 같은 꼬리표를 붙였던 것일까. 꼬리표를 붙인 양탄자들은 신라에서 만든 것임을 표시한 일종의 수출 상품이었다. 2. 신라의 수출상품 정창원의 양탄자들은 신라 진골 귀족가문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는 페르시아의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독자적인 양탄자를 생산해 냈다. 신라의 모직물 제작기술에 대해서 중국 <두양잡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교묘하고 아름답기가 일세의 최고였다. 춤추고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벌과 나비가 춤추는 모습이 마치 실제와 흡사하여 진위를 구별할 수가 없다’ 3. 신라 사절단의 행적 신라 사절단이 일본에 온 이유는 동대사의 대불 개안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황실은 3년 여에 걸친 노력 끝에 노사나대불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를 자랑하기 위해 일본내의 귀족들은 물론 각국의 사절단을 개안식에 초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나라에 도착한 신라사절단은 370명 뿐으로 일본에 온 총 700명의 인원 중 330명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했던 것일까. 4. 신라물건은 신분과시용? 정창원에 보관된 유기제품 중에는 신라에서 수출 될 당시의 포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도 있었다. 당시 일본 귀족들은 신라유기를 사용해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조개껍데기에 나무를 엮어 숟가락 대신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시 신라의 유기로 만든 숟가락세트는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이처럼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물건들은 단순한 수입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일본귀족 문화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상층 귀족문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5. 천평문화의 기반이 된 신라 화려하고 귀족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정창원의 보물들은 8세기 전후 세계각지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정창원의 보물로 상징되는 8세기 일본문화를 천평문화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천평문화를 당과의 직접 교류를 통해 이룬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7,8세기 당과 일본 사이의 교류 현황을 살펴보면 단지 네 차례에 불과하다. 반면 같은 기간동안 일본에서 신라로 24번. 그리고 신라에서 일본으로 총 39번의 사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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