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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저한 고증을 거친 고려마을 드라마 무대로 만들어진 고려마을에는 웅장한 건물 하나가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고려궁궐의 중심 건물로 왕이 업무를 보던 회경전이다. 또한 초가집 50여 동이 줄줄이 들어서 있고 곳곳에 시장거리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서민 가옥인 마루집이 있고, 화려한 귀족의 가옥도 자리잡고 있다. 2. 왕건이 내린 성과 본관 ‘벽진 이씨’,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가 있기 1년 전 이총언에게 이씨 성과 함께 벽진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인 본관을 하사하며 자연스럽게 고려의 세력으로 끌어 들인다. 고려의 벽진은 현재의 경북 성주 지역이다. 약 60여 호가 모여 사는 홈실마을은 생긴 지 800년이나 된 벽진 이씨의 집성촌이다. 벽진 이씨의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마을의 종가를 찾았다. 3. 왕건의 부인 29명 왕건은 그의 나이 예순 살까지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왕비로 맞이하는데, 모두 지방 유력 가문의 딸들이었다. 비록 이유와 명분이 있는 결혼이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여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왕건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4. 친필에서 드러나는 왕건의 성격 왕건역을 맡은 탤런트 최수종씨는 왕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덕을 최고로 하는 인물이다. 포용력 있고 때를 기다릴 줄 알고 참을성이 있는 인물이다.’그렇다면 실제 왕건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왕건의 친필을 통해 왕건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 보기로 했다. 왕건의 친필은 풀이 뒤엉키듯 자연스러운 초서체의 글씨였다. 5. 거대한 사찰 개태사 충남 논산의 개태사는 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 왕건이 세운 절이다. 당시 개태사는 지금의 조계사처럼 전국의 불교를 관장했던 곳인데, 이 개태사에는 창건될 때부터 있었던 어마어마한 솥이 하나 있다. 만약 실제로 이 솥을 사용했다면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개태사의 발원문에는 왕건이 꿈꾼 통일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6. 국제 무역항 벽란도 ‘코리아’가 고려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는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회였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국제 무역항 벽란도이다. KBS는 제천에서 만2천 여 평의 공간에 벽란도를 복원해 냈다. 드라마를 위해 고증을 거쳐 제작된 120미터 길이의 선착장 양쪽으로 두 척의 고려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7. 고려의 호텔, 객관 수도 개경에는 커다란 호텔이 무려 10여 군데나 있었다. 바로 객관인데, 벽란도를 통해 개경으로 들어온 외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객관에는 외국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던 연회장도 있었다. 8. 고려의 대외문화 고려의 대외문화에 대한 자세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특히 고려인들은 중국지역에 많이 진출했는데, 상인들이 얼마나 많이 진출했던지 사신들과 함께 고려인들이 너무 많아 당대 최고의 문장가 소동파는 철종에게 상소를 여러 번 올린다. 소동파의 상소문은 세계속의 코리아로 발돋움한 고려인의 역동성과 진취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주 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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