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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스터리의 사찰, 회암사 천보산 끝자락에 자리한 회암사터는 3년에 걸친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는 일반 유물과 더불어 경복궁에 사용되는 봉황과 용이 그려진 기와, 백자접시, 잡상 등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보광전 추녀끝에서 발견된 금탁이었다. 2. 회암사의 진면목 금탁은 풍경을 말하는데 13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통해 회암사의 존재 를 처음으로 확증할 수 있었다. 또 이 금탁에는 조선국왕, 왕 현비, 세자라는 명문이 나타난다. 이들은 누구일까?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회암사의 시주자를 추적하였다. 이득분이라는 내시를 거쳐 실마리는 태조 이성계에 닿았다. 3. 왕궁을 닮은 사찰 회암사는 일반 사찰의 구조와 다르다. 사찰의 중심은 대웅전이 아니라 보광전이다. 전체적인 배치와 세부적인 부분을 살펴보면 회암사는 절보다는 왕궁을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회암사는 태조가 자주 드나들면서 궁궐의 배치를 닮아간 이성계의 또 다른 왕궁이었던 것이다. 4. 이성계의 정신적인 은신처 회암사를 창건에 가깝게 중창한 인물은 승려 나옹이다. 그러나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1376년 입적한다. 나옹의 친구 무학은 이성계의 건국동지이기도 하다. 무학이 회암사 주지가 되고 나서 이성계는 이 절에 자주 들렀다. 이런 친분 외에 이성계가 불교로 귀의하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그는 아들과 신하를 잃는다. 이런 정치적인 소용돌이가 불교로의 귀의를 부추긴 것이다. 5. 숭유억불 시대를 역행한 회암사 다른 사찰들이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는 동안에도 회암사는 오히려 전답과 노비를 하사 받고 250명의 승려가 머무는 대사찰로 성장한다. 그 이유는 이곳에 선대왕의 제사를 모셨기 때문이다. 조선은 종묘를 세우고도 불교방식의 옛 관습을 쉽게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또 회암사는 사용된 건축기술도 첨단적인 것이어서 과학적인 온돌구조, 철저하게 계획된 배수로 조경시설, 당시 유행하던 풍수사상까지 건축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6. 회암사의 몰락 발굴 도중 하나같이 목이 잘린 석재 불상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조선의 불교 탄압정책의 흔적이었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뜬 뒤부터 사찰을 탄압했다. 회암사가 사라진 시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은 본격적인 유교국가로 자리잡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회암사는 불교의 마지막 화려한 불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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