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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과의 이혼 감동은 남편을 따라 무안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당시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그 지방에서는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병을 핑계 삼아 한양으로 올라온 감동은 당시 사대부 집 여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연애를 누리게 되고, 그 결과 그녀는 남편에게 일방적인 이혼을 당하게 된다. 2. 조선시대의 이혼제도 조선시대에도 이혼제도가 있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의 이혼문제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으며, 불가피한 상황 외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3. 이혼이 성행했던 세종시대 이혼을 하려고 해도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조선시대. 그런데 감동이 살았던 세종시대에는 유독 이혼과 간통 사건이 많았다. 정치적 안정기일 뿐 아니라, 사회가 안정되고 유교 체제를 갖춰가던 세종 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4. 뒤바뀐 삶 유감동은 철저한 정절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의 첩으로 행세하기도 하고, 창기로 행세하기도 하면서 문란한 생활을 일삼는다. 감동이 스스로 신분을 속인 이유는 이렇다. 사대부 집 여자라는 사실일 밝혀지면 자신에게도 피해가 미칠 뿐 아니라 감동과 관계를 한 남자들에게도 큰 벌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유감동은 단순히 자신의 욕정을 다스리지 못해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5. 용서 받지 못할 간통죄 감동의 경우. 분명 이혼 당한 여성, 즉 남편이 없는 데다가 스스로 창기라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통죄가 성립했다. 간통죄는 다른 죄와는 달리 시대의 흐름이나 국가마다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죄의 성립 조건이 매우 다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간통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으며, 현재의 간통과의 어떤 차이점이 있고, 그에 따른 형벌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보자. 6. 조선 여인들의 명예 - 열녀 조선 전기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이혼녀보다는 유교 사상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열녀들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극단적인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조선 여인들의 열녀가 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7. 어우동 지난 천 년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로 손꼽히기도 했던 어우동. 어우동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은 그릇을 만드는 공인과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는다. 친정 집에서 슬픈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우동. 마침내 어우동은 자유로운 여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름을 현비로 개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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