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구는 삼국 시대에 주부토라 불리우면서 백제국에 속했는데,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고구려에 속하게 된다(475년).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신라에 영속된다. '주부토'라는 이름은 원래 부평 평야가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습지로 황무지였다. 그래서 주민들이 봇둑을 쌓았는데 그 '봇둑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고 하여 '줄보뚝'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줄보뚝이 한자로 '主夫吐'가 된 것이다.
757년 이 지역을 장제군으로 지명을 바꾸는데, '장제'라는 말도 '긴 뚝'을 뜻하며, 고려 태조 때는 장제군을 '수주'로 이름이 바뀌어진다.
이 때 서구는 수주 관할의 황어현에 일시 속하다가 부평현과 황어현이 통합되면서 비로소 부평현에 속해진다. 1150년 고려 의종은 수주를 없애고 한강을 낀 계양산이 수도 방위에 중요한 위치라고 생각하고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안남도호부'를 설지한다. 그후 1215년 '계양도호부'로 개칭하고 1308년에는 '길주목'으로 승격된다.
구한말(1895년) 서구는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으로 구분되는데, 그 경계는 승학현(싱아고개)으로 모월곶면은 지금의 심곡동 이북이며, 석곶면은 가좌동 이남이다.'모월곶'이란 땅모양이 마치 반달같이 생겼는데 작은 맥이터럭(모밭)과 같이 뻗어 내려서 '터럭이 많은 반달과 같은곳이다.' 하는 뜻이다. '석곶'이란 돌(石), 곶(串)이며 '땅 모양이 길게 뻗어 있고 돌이많다.'고 '돌곶이'라 불렀다. 1914년 지방 제도 개혁으로 부군면이 통폐합될 때 부천군 거곶면이 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 구역 확장으로 인천부에 편입되어 서곶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8년 구제가 실시되면서, 인천시 북구에 속하게 되고 1988년에 북구에서 분구되어 12개 법정동, 10개의 행정동으로 서구가 개칭되었다. 검단은 원래 김포에 속해 있었다.
백제 시대에는 김포를 '양주'라 불렀으며, 고구려때는 '포현'으로, 신라 시대에는 '김포현'이라 했다. 1413년(조선 태종) 김포현과 양천현을 병합하여 '김양현'을 만들 때ㅡ 김양현에 속하게 되고 1416년(조선 태종) 김포현이 분이되면서 김포현에 영속된다. 조선 중기김포군에 면을 설치할 때, 검단 지구는 검단면, 노장면, 마산면 등 3개 면으로 구분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3개면이 통합되어 검단면이 된다. 같은해 10월 검단면 금곡리 일부가 양촌면 대포리로 편입되고 당하리 일부가 부천군 계양리, 오류리, 갈산리에 편입되었다.
1995년 김포군 검단면 일원이 인천광역시 서구가 되어 검단 관할의 법정리를 동으로 개정하고 서구 검단 출장소 및 검단동을 설치 하였다.1995년 1월 1일 인천직할시는 인천광역시로 승격되었다. 같은 해, 검단면이 서구에 편입되어 면적이 면적이 67.43㎢에서 109.95㎢로 확장되었고 자연부락 5,690가구에 인구 20,579명의 주민이 서구에 편입 1996년 9월 30일 현재 총 93,467가구에 인구는 305,415명, 20개의 법정동, 16개의 행정동에 587개의 통, 2,739개의 반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1개의 유인도와 5개의 무인도가 있다.
서구 구민의 날은 9월 21일 이다. 24절기 중 가장 황금의 절기인 추분 전후로 도시와 농촌의 풍요로움이 가득하고 드높은 가을 하늘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가 깃드는 연중 최고의 절기일 ?이다. 서구를 상징하는 것은 사랑과 만남을 연결해주는 순결한 마음의 '까치' (구의새), 모두에게 안정과 풍요로움을 주는 '국화' (구의 꽃), 강인한 의지와 무궁한 발전을 뜻하는 '은행나무' (구의 나무), 평화와 사랑 그리고 인내의 표상인 '사슴' (구의동물)이다.
검단
신(神) 또는 왕(王)을 뜻하는 고대어 검[黔=儉=衿]과, 곡(谷. 마을)을 뜻하는 고대어 단[丹=旦=屯=呑]의 합성어로, 즉 신 또는 왕의 마을, 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검단(黔丹)’이라 칭했다고 이해된다.
대곡동(大谷洞)
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한골’·‘황골’·‘황곡’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한자로 쓰면서 ‘대곡(大谷)’이라 하였다.
두밀(斗密)
마을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네모진 말[斗] 같이 생겼다 하여 마을 이름을 ‘두밀(斗密)’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일설에 의하면 망해사(望海寺) 주지가 이 마을은 어느 곳이나 우물을 파도 샘이 말[斗]로 솟아난다 해서, ‘두밀’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마을의 주위 산이 병풍처럼 모여있어 다른 고을과는 왕래가 뜸하였지만 쌀을 말에 부으면 말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인심이 후하다 하여 ‘두밀’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산이 사방으로 막히고 나무가 울창하고 조용한 마을로 두견이 와서 놀며 계곡도 깊은 곳이어서 두곡(杜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태정(台亭)
선조의 부마인 신익성의 부인인 정숙 옹주가 지금의 황곡부락에 거주하면서 아기를 낳았는데 이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태정’이라 부른다.
불로동(不老洞)
전설에 따르면 마을 앞산인 만수산(萬壽山)에 산삼을 비롯하여 각종 약초가 많았는데, 어느 노인이 이 산에 올라가 산삼과 약초를 채취하여 이것이 나물인지 알고 먹은 후 장수하였으며, 후에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만수산의 불로초(不老草)를 캐기 위하여 많이 모여들었다. 그 때부터 이 마을을 ‘불로동(不老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목지(木枝) 마을
옛날 마을 안에 당집 한 채가 있었는데, 뒤에 있는 큰 나무의 가지가 당집을 덮었다 하여 ‘목지(木枝)’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마전동(麻田洞)
옛부터 이 마을에서 삼[麻]을 많이 재배했기 때문에 ‘마전(麻田)’이라 불리웠다.
여래(如來)
원래는 마을 이름이 ‘여리’였으나 이 마을을 지나던 풍수장이가 ‘여래(如來)’로 고치면 마을이 풍요롭게 될 것이라 하여 그 말을 따라 고쳤다고 한다. 또 예전에 이 마을에 살면서 적선(積善)을 많이 한 여래(如來)라는 승려를 기리는 뜻에서 승려의 이름을 마을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가현(歌絃)
가현산(歌絃山) 남쪽 큰 골에 자리 잡은 마을이기에 산이름을 따서 ‘가현(歌絃)’이라 부르게 되었다.
가현산(歌絃山)
검단동과 양촌면 간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215m의 산이다. 원래 산의 형세가 코끼리 머리 모양같다고 하여 고려시대부터 ‘상두산(象頭山)’이라 불러 왔다. 그 후 ‘개연산(開連山)’ 또는 칡이 번성하다는 의미의 ‘갈현산(葛峴山)’이라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원현(院峴)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들이 쉬어가는 집이 있어 숙소로 사용하였으며 마을 앞에 고개가 있어 두 글자를 합하여 ‘원현’이라 불렀다.
완정(完井)
고려시대부터 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데 물 맛이 좋고 물이 잘 나서 ‘완정’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금곡동(金谷洞)
옛날 풍수장이가 이 마을을 지나 가다가 마을 뒷산에 쇳돌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 후부터 ‘금곡리(金谷里)’라 부르게 되었다. 실제 이 마을에서는 일제 말까지 금(金)을 채굴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다량의 철을 채굴했다.
좌동
조선 초기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자신들의 선조(先祖) 성지(聖地) 터 왼쪽에 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하여 ‘좌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일설에 의하면 마을의 형태가 왼손을 편 모습 같다고 해서 ‘좌동’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하며, 또 옛날 망해사 주지가 마을 이름에서의 ‘좌(左)’자 옆에 ‘사람[人]’을 붙이면 앞으로 이 마을이 번창할 것이라 하여 ‘좌동(佐洞)’으로 변경하였다
신동
조선시대에 통진현(通津縣)에서 나뉘어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라 하여 ‘신동(新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류동
옛날 이 마을에 오동나무[梧] 숲이 많았으며, 그 옆에 버드나무[柳] 한 그루가 서 있었기에 이들 나무 이름을 따서 ‘오류(梧柳)’라 칭했다.
봉화촌(烽火村)
마을 뒷산 백석산(白石山)에 봉수대가 있었기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대촌(大村)
다른 마을보다 큰 집들이 많이 모여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부자마을의 의미로 ‘대촌(大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반월촌(半月村)
마을 서편에 있는 섬 반월도(半月島)에서 이름을 따서 ‘반월촌(半月村)’이라 불렀다. 한편 이 마을을 안고 있는 산의 형국이 반월형(半月型)이었기에 ‘반월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왕길동
조선 중엽에 어느 풍류객이 이 마을을 ‘왕길(旺吉)’이라고 작명하여야만 이 마을에 덕(德)이 있고 생활이 풍요로울 것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그렇게 칭하였다고 한다.
안동포리(安東浦里)
원래는 부성포(富盛浦)라 불렀으나, 후에 안동권씨(安東權氏)가 이 포구 마을에 입향하여 살게되면서 ‘안동포(安東浦)’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약수동
이 마을 뒷산에 약수(藥水)가 있다 하여 ‘약수동’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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