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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이었다

천지인야 2013. 2. 7. 22:15

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이었다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열 여덟에 문단을 휩쓸어 한 화살로 금문책을 꿰뚫었네’
중국의 한 유명한 문인이 최치원에게 바친 이 시(詩)는 당시 최치원의 문장이 중국 대륙을 얼마나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는지를 표현하고 있다.
 
     세부설명
  1. 중국에서의 관리생활

어린나이에 중국으로 유학간 최치원은 약관의 나이에 율수에서 관리가 된다. 그곳에는 관리로서 그의 치적이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쌍녀분. 쌍녀분은 강제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씨 자매의 묘였다. 이들을 위해 최치원이 위로의 시를 바치자 감동한 두 소녀의 혼령이 그날 밤 최치원을 찾아가 만났다고 한다.


2. 조기유학의 배경

6두품의 말단 관리였던 최치원의 아버지는 골품제도 아래서 신분의 한계를 체득한 사람이었다. 6두품은 성골, 진골에 다음가는 계급으로써 국가경영에서는 작은 역할을 했지만 학문과 사상면에서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6두품이 자신의 경륜을 펼쳐보이는 길은 당나라에서 과거 급제하여 돌아와 그 권위로 뜻을 펴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이런 열망은 어린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보내기에 이르렀다.


3. 당에서 최치원의 유학생활

장안은 국제 도시였다. 외국에서 온 유학생은 국자감에서 수학했는데 한때 그 숫자는 8천명에 이르렀다. 당나라 정부는 유학생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고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는 않았지만 중국 전통에 따라 스승에게 선물을 바쳐야 했다. 당시 유학생들의 최대목표는 과거 급제였는데 이는 아마도 큰 부담이 되었으리라. 최치원은 '인백기천'으로 노력한 결과 중국으로 건너간지 6년 만에 장원급제 한다.


4. 중국에 남아있는 최치원의 흔적

당나라 때 급제한 사람은 두루 명승지를 유람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최치원도 현위 시절, 자주 여행을 다녔다. 중국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당나라 유명한 시인들과 서로 교류하기도 했는데 외국임에도 문장구사에 어색함이 없었다.
중국의 권위 있는 역사서 신당서에는 최치원의 계원필경을 소개하고 있는데 신당서에 언급된 외국인의 작품은 최치원이 유일하다.


5. 계원필경

계원필경은 현위 시절 이후에 지은 것으로 중국에서도 중요한 역사서로 다루어지고 있다. 당나라에 최치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875년. 정치혼란과 계속되는 흉년 속에서 일어난 황소의 난 때였다. 당의 수도까지 점령한 황소무리를 잠재운 것은 바로 신라인 최치원의 격문인 격황소문이었다. 그 공로로 최치원은 중국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는다. 불과 25살에 중국황제로부터 인정 받은 것이다. 만일 그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중국에서 출세는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6. 최치원은 신라의 개혁을 꿈꿨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당시 유학파와 국학 출신과의 갈등에 염증을 느껴 함양태수라는 말직을 자청했다. 그러는 동안 최치원은 나름대로 사회개혁안을 구상한다. 지방의 관아에 있으면서 느낀 문제점들을 마지막 충정을 담아서 올린 시무 10여 조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골품제의 개혁과 과거제의 실시 등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신라말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려 했던 그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빛나는 저술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