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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승업은 조선시대 최고의 갑부 허생전 변부자의 실제모델로 알려진 숙종 시대 역관 변승업은 지금으로 말하면 천억 이상의 돈을 가진 부자였다. 그리고 부인이 죽었을 때 감히 왕가의 상제를 행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던 인물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중인이 양반처럼 선산을 구축한 것은 당시 변승업 집안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2. 역관의 부 축적 근원은 청일간의 중개무역 당시 사대부들은 외국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역관은 외교상 이루어지는 모든 부문에 간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구입한 물품들을 청과 무역을 할 수 없었던 일본에 두 세배의 차익을 남기고 팔았다. 17세기 후반, 청과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고 왜관을 통해 중계 무역이 이루어지자 역관은 더욱더 많은 부를 축적 할 수 있었다. 3. 부와 명예, 역관들은 세습을 원했다 변승업의 경우 형제 9남 1녀 중 6명이 역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후손까지 계속되어 280년간 106명의 역관을 배출했다. 역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은 사역원이었는데 이 곳은 역관의 추천을 받아 심사를 통과한 사람들만이 입학할 수 있다. 그리고 전, 현직 역관들이 직접 이들을 심사했다. 천거 받기도 어렵고 천거 됐다 하더라도 누가 추천을 했느냐에 따라 합격에 상당한 영향이 있었으니 당연히 세습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사역원의 교재 사역원에는 우어청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는 조선말은 쓰지 못하고 외국어만 사용하게 한 순수한 회화 교실이었다. 교재로는 중국어에 <노걸대>, 일본어는 <첩해신어>가 사용되었고 이 책은 완전한 구어체로 만들어져 있다. 교역에 관련된 실용 대화들이 많고 문장의 구성도 상당히 체계적이다. 5. 외교에서의 활약 사역원의 우수한 인력은 무역뿐 아니라 외교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현종 때 김지남 부자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청의 땅이 될 뻔했던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는 쾌거를 달성한다. 이들은 재력이나 사회적인 면으로 공을 인정 받아 중인 신분으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6. 구한말의 역관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고 국제여행이 힘들었던 이 시대에 역관은 변화하는 세계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많은 신문물들이 역관을 통해서 전해졌다. 이렇게 역관들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선구자 역할을 하며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누구보다 먼저 깨우쳤다. 이들은 신분철폐 운동, 개화 사상을 싹 틔웠고 급변하는 조선 후기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떠가는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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