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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마패는 역참과 함께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원은 신라 소지왕 487년 3월에 우역이라하여 사방에 소관 관아를 통제할 수 있도록 통신소를 설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를 운용하는 사람에게 마패를 내려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고려 원종15년 때부터입니다. 그리고 마패하면 쉽게 놋쇠로 된 둥근패를 연상하는데, 조선초기에는 금속이 아닌 나무로 된 마패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질이 나무이다 보니 사소한 실수로 마패가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살펴보면, 병조에서 아뢰기를, “마패(馬牌)를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속속 상하고 쪼개지오니, 철재(鐵材)로 이를 제조하되, 대소와 후박(厚薄)은 순패(巡牌)보다 약간 작게 하고, 주성(鑄城)한 월일과 인적(印迹)과 자호(字號)는 목패(木牌)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16년 1434년 2월 25일 이렇게 목재로 된 마패에서 금속으로 된 마패로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보면 명나라의 마패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짙은 누런 빛 무늬 없는 비단에 오목(烏木)을 축(軸)으로 한 두루마리다. 길이는 두 자 네 치요, 넓이는 다섯 치 남짓하고, 가장자리에는 룡(龍)을 수놓은 복판에 안장을 갖춘 붉은 말 한 필이 놓여 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연암이 기술한 비단 두루마리 마패는 외국사신들이 명나라에 왔을 때 통행증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마패는 모두 붉게 칠한 가죽통에 넣어서 주석 장식을 붙이고 또 녹피(鹿皮) 주머니에 넣어 다녔습니다. 이렇듯 마패는 역참에서 말을 빌릴 때 제시했던 증빙서이기도 하면서 통행증 혹은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때 사용된 마패의 전체 숫자는 각도(各道)에 있는 것이 160여 개, 서울에 있는 것이 510여 개로 약 670여개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마패를 잃어버리거나, 위조하면 그 문제가 조종의 중심기관인 의정부에서 논의되고 죄를 문책할 정도로 큰 사안이 되곤 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 고종3년(1866년)의 내용을 보면 마패를 위조한 자를 문책하여 목을 잘라 걸어 놓는 효수형에 처하기도 하였고, 일성록 정조10년(1786년)의 기사를 보면 마패를 주워 헌납한 사람에게 큰상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패의 뒷면에는 연호·연월일과 '상서원인(尙瑞院印)'이라 하여 옥새와 인장 및 병부(兵符)를 담당했던 기관인 상서원에서 발급한 내용이 적혀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연호로 인하여 외교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때 명(明)에서 청(淸)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 청나라에게 빌미가 되어 외교문제로 비화되려 했으나 조선에서 이를 급히 수정하여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후 마패는 조선말기까지 사용되다가 전신, 전화 등 말의 속도를 능가하는 서구문물이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역참 제도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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