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學習/♧ Epi ♤ Story

한양도성터

천지인야 2016. 9. 9. 16:34



1,000만명의 시민이 살아가고 있는 서울! 세계 10대 도시로써 그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 서울은 언제부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서울이다"라고 정해진 걸까요? 바로 한양도성으로부터 그 범위가 정해진 것이랍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을 둘러싼 한양도성! 

오늘은 이 한양도성 터와 관련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고려 공민왕 시절부터 신흥무인세력으로 급부상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명실상부한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고려를 지키고자 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제거하자, 4개월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이성계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답니다. 1392년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고려 왕위를 선위받았고, 이듬해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습니다.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바로 수도를 옮긴 것은 아니었답니다. 이성계는 민심을 사로잡고자 선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왕궁이 아닌 자신의 개경 사택에서 왕궁으로 '출퇴근'을 하곤 했습니다. 





(▲태조 이성계 어진  전주 경기전 소장)                   (▲삼봉 정도전 영정  권오창 화백 作)



하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지 얼마되지 않은 1394년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습니다.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무학대사의 영향이 컸다던지, 자신이 제거한 사람들이 많았던 개경에서 머물기가 껄끄러서웠다던지 하는 추측이 많은데요. 필진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성계의 정치적 동반자인 정도전의 영향이 다소 크지 않았나 합니다. 당시 기득세력인 불교와 권문세족의 탐욕으로 피폐해지던 고려를 보며 강한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던 정도전에게 있어서 개경은 개혁 정치를 펼치기에는 고려의 색이 너무나도 짙은 도시가 아니었을까요? 개경을 주름잡는 고려의 옛 권세들을 정리하고 유교이념을 담아낼 수 있는 신도시로 옮기기에 '한양'이 적합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흥 무인세력이었던 이성계에게 있어서 정도전은 단순한 신하가 아닌,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킹메이커'인만큼 그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였을 것입니다. 





1394년 '한양천도'가 결정이 되자 이성계는 가장 먼저 궁궐과 종묘, 사직단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이 세워진 것은 그 후 1년 뒤였습니다. 궁과 종묘, 사직단의 터전을 마련한 후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한양도성을 세울 것인지를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성계는 한양도성 건설을 위해 임시기구로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도성축조를 일임하였습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왕 이성계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정도전은 한양도성 터를 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 정도전은 무학대사와 의견이 엇갈리게 됩니다. 



(▲ 무학대사 영정 출처: http://www.naver.com)


정도전이 이성계의 정치적 파트너였다면,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종교적 파트너로써 불교를 좋아하던 이성계에게 정도전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즉, 이성계 시대의 두 거물이 '한양도성 터'를 두고 대립하게 된 것이지요.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인왕산의 선바위를 한양도성 안으로 할 것인지, 밖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크게 엇갈렸다고 합니다. 자신의 두 거물 파트너들이 한양도성 터를 두고 대립하게 되자, 이성계는 큰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게되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조선불교통사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양 측의 주장이 크게 엇갈리자 이성계는 그 어느 편도 들기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도전도, 무학대사도 이성계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이성계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 한양에 큰 눈이 내렸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 눈이 어떤 둘레를 따라서 안쪽으로는 눈이 녹고, 그 바깥 쪽으로는 눈이 녹지 않았는데요, 이성계가 이를 보고 눈이 녹은 선을 따라 한양도성 터를 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한양도성 터를 하늘이 점지해주었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 눈이 내린 한양도성 출처: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428 )



이렇게 어렵사리 정해진 한양도성 터는 북악산, 남산, 낙산, 인왕산을 잇는 약 18km의 길이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1396년 1월에 1차 공사에 착수하게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인원과 물자가 동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49일이라는 기간에 너무 급히 공사를 진행하는 바람에 여름 장마에 도성 곳곳이 무너지게 되자 2차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2차 공사 때는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1차 공사 때 축조하지 못한 부분을 완성하였습니다. 2차 공사가 끝나서야 비로소 한양도성은 오늘 날의 모습을 띄게 되었답니다. 

 

출처 : 한양도성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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